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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프완님





#1 반장과 나



"선생님, 채점 다 했어요."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른 목소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경마 신문을 들추었다. 시험지 뭉치를 들고 서 있는 우리 반장은 불평불만을 얼굴로 다 말하고 있었다. 제 딴에는 참는 거겠지만 결국 다 얼굴에 드러나 버리는 점이 귀엽다. 나는 씩 웃으며 쵸로마츠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 역시 빠르네. 수고했어, 반장."


"앞으론 이런 거 시키지 좀 마세요. 채점은 선생님이 하셔야죠."


"미안, 미안~ 양이 꽤 많다 보니 성적 확인 날까지 못 할 것 같아서~"


사실은 널 잡아두기 위한 핑계지만. 시험 전후에는 배려로 과제도, 행사도 없다 보니 이런 이유 아니면 교무실에 부를 거리도 없다. 나야 반장도 보고, 일도 줄어들어서 좋지만.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채점은 제대로 했는지 시험지를 훑어보았다. 쵸로마츠는 자신의 시험지도 정답, 오답 딱딱 따져 채점해놓았다. 대충 동그라미 쳐도 못 본 척 넘어가 줄 수도 있었는데 성실하기는. 말로 했다간 그러고도 선생이냐며 호통이 날아왔을 생각을 하며 두툼한 시험지 더미를 서류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쵸로마츠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서술형 같은 건 집에 가서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좋아! 그럼 이제 퇴근해볼까!"


오늘 하루도 고생한 몸을 쭉 피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쵸로마츠는 표정을 펴지 않은 채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동아리도 집에 간 시간이라 그런지 학교 안이 적막했다. 학교 운동장에는 운동부 학생들 대신 붉은 태양 빛만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쵸로마츠는 멀거니 노을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노을빛 속의 쵸로마츠는 잘 어울리면서도 어쩐지 이질감이 든다. 반듯한 교복, 꼭 쥐고 있는 가방, 쓰고 있는 뿔테 안경까지 어디로 보나 모범생 그 자체인데 오늘처럼 노을이 아름답던 날엔 그 날의 쵸로마츠가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쵸로마츠?」


그 날은 나 정도 되는 사람도 놀라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갔었다. 내 목소리에 쵸로마츠는 흠칫 놀라며 손에 든 것을 떨구었다. 아니, '것'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엄연한 사람이니까. 눈물과 코피가 뒤섞이고 교복이 거의 뜯어져 몰골이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봐도, 어디로 봐도 그 학생을 그렇게 만든 것은 쵸로마츠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당황해서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동공에는 분노와 열기가 어려있었다.


「이야~ 화려하게 저질렀네, 우리 반장.」


재미있는 녀석.


저절로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저 눈빛, 저 행동. 철없던 시절의 나와 똑 닮아있었다. 수수하고 지지리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반장이 설마 이런 면모를 갖고 있었을 줄이야. 성실함 뒤에 숨겨진 악랄함,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도 학생 한 명을 때려눕힌 주제에 아기 양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고. 아마 다른 사람들 앞에선 이런 모습 보이지 않을 테지.

자, 그럼 선생 노릇 좀 해볼까? 나는 쓰러져있던 학생을 업었다. 완전히 기절한 것인지 제법 무거웠다.


「아이고, 정신을 못 차리네. 생각보다 심각한데? 병원 데려가야 하나.」


「......」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겠지? 생글생글 웃으니 쵸로마츠는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는 걸까. 뭐, 난 그 표정도 마음에 들었으니 괜찮지만. 쵸로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였다. 꽤나 자존심 상하는지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못 본 척해주세요...」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윽.. 못 본 척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에이, 본 걸 어떻게 못 본 거로 해. 그럴 순 없지.」


나는 쵸로마츠쪽으로 얼굴을 쭉 내밀었다. 짜증과 분노로 가득 찼던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비밀로 해줄 순 있지.」


「엣.」


「우리 쵸로마츠군이 선생님 말만 잘 듣는다면?」


그때 그 순간의 쵸로마츠 표정을 잊지 못한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이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 억울하다는 복잡미묘한 표정. 늘 무표정으로 ㅅ자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몰랐는데 표정이 상당히 풍부하다. 넌 또 어떤 표정을 갖고 있을까. 나는 쵸로마츠를 놀리는 듯이 웃었었다.


"하아..."


"쵸로마츠, 그렇게 한숨만 푹푹 내쉬면 행복이 다 달아나버린다고?"


아, 지금 저 표정은 '제 행복은 이미 달아나버린 지 오래입니다만.'이라고 말하는 표정이다. 정말 티가 나도 확 난다. 용케도 성실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뭐, 잘 해내고 있는 걸 보면 쵸로마츠는 원래 성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성질도 그만큼 거세서 어렸을 땐 그게 더 돌출되었던 걸지도.


"그보다 배고프지 않음? 저녁 먹지 않을래?"


"또요? 저는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요..."


집 가면 또 대충 저녁 때우고 말 거잖아, 너. 나 때문에 가족들이랑 저녁 시간이 엇갈리다 보니 이 녀석 돌아가는 길에 빵 같은 걸 사 먹거나 거르고 있다고 그랬다. 누가 알려줬냐고? 어머니가. 쵸로마츠가 이런 얘기를 할 리가 없지. 쵸로마츠가 늦게 집에 가니까 걱정하실까 전화한 건데 이런 이야기 들었을 때는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안 그래도 마른 애가 점점 말라간다 싶더니만. 원인이 나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그냥 보내기는 싫어서 최근엔 밥을 먹여서 보내고 있다. 월급이 쥐꼬리이긴 해도 이런 녀석 밥 한 끼 정도는 사 먹일 정도는 있다.


"선생님, 외로움쟁이라구? 좁디좁은 방 안에서 혼자 밥 먹기 싫다구? 아아, 누가 같이 밥 먹어줬으면 좋겠다! 입에 아무것도 안 들어가니 뭔가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네~"


"아!! 알겠어요, 알았다고요! 같이 먹으면 되는 거죠?!"


"정말이지? 우리 쵸로마츠 착하다, 착해."


무엇보다 이래저래 해도 넘어와 주는 쵸로마츠가 좋다. 기분 좋아서 머리를 쓰다듬으니 쵸로마츠가 날카롭게 손을 쳐냈다. 워후. 무서워라. 가끔 이렇게 자기가 약점 잡혀있다는 걸 까먹은 것처럼 구는데 이건 이거대로 좋으니 나도 참 중증이다. 분명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쵸로마츠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반장 진로 희망서에 '유능한 회사원'이라고 적었던데."


"푸흡!"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거 너무 심하지 않음?"


"그그그그런 얘기를 보통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해요?! 그리고 초등학생이라니 그거 선생님한테만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인데!"


"진정하고 일단 앉아."


앉으라고 손짓하자 쵸로마츠는 물 한 컵을 원샷하고는 나를 날카롭게 째려봤다. 볼에 밥풀 묻히고 그렇게 봐도 말이지...


"아직 1학년이고 고민이 많은 건 알지만 말이야. 자신만만하게 첫 번째로 내놓고 유능한 회사원이라니."


"그게 뭐 어때서요. 현실적이고 평범하고 괜찮은 직업인데."


"너무 광활하잖아.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건데?"


"그건..."


쵸로마츠는 시선을 내리깔고 숟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했지만 생각해본 적이 없구만. 쵸로마츠는 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아마 고등학생이 되면서 성실하게 바뀐 것도 그 때문이겠지. 남들 시선이 어찌 되든 좋다면 그 날 내 협박에도 넘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냥 이대로 남들의 시선에 따라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아? 아직 네 생각이 없다면, 그렇다면...


"있지, 쵸로마츠. 선생님 해볼 생각은 없어?"


내 곁으로 와, 쵸로마츠.


"엥? 거기서 선생님이 왜 나와요?"


"너 반장 하는 거 보니까 반 통솔도 잘 하고, 내 일 처리도 빨라서. 적성에 맞는 거 아냐?"


"그건 그냥 선생님이 안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부루퉁하게 부푼 볼이 귀여워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얘는 정말 내가 그냥 일하기 싫어서 자기를 부르는 줄 아는 걸까. 하긴 쵸로마츠는 은근 단순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단순히 그런 거였으면 이렇게 같이 밥 먹거나 하진 않을 텐데. 둔한 것도 귀엽지만 조금은 눈치채주었으면 하는 것도 바람이다.


"그래도 너 선생님 하면 진짜 잘 할 것 같단 말이지."


"...정말요?"


같은 선생님이 되면 쉬는 날이 비슷해져서 만나기 쉬워져.


"네 성적 보면 영 아니지만."


"윽."


그러니 선생님이 된다고 하면 내가 공부 봐줄게. 1 대 1로.


"그래도 우리 쵸로마츠 참 성실해. 자기 시험지를 그렇게 딱딱 채점할 줄은 몰랐어. 나라면 대충 동그라미 쳤을 텐데."


"아, 진짜! 지금 놀리는 거예요, 뭐예요!"


"그래서 좋다고."


눈치채줘.


사심 가득한 말을 내뱉고 나자 쵸로마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귀엽네.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쵸로마츠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기 전에 밥풀은 떼어주고 가야지. 굳이 내 손으로 직접 떼는 것도 내 사심이다. 선생 실격이네. 뭐, 상관없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자 쵸로마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 뭐야. 이거 무슨 상황?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가 다 당황스러웠다. 이건 마치 키스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잖아. 몰래 마른 침을 삼켰다. 해도 되는 걸까. 이건 해도 된다는 신호 아냐? 뺨에 손을 대고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쵸로마츠의 콧김이 바로 닿는다.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지금 키스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선생과 학생 관계를 떠나 이렇게 밖에서 쵸로한테 키스를 해도 괜찮나? 이 남의 시선 신경 쓰는 녀석한테?


아까 선생 실격 상관없다고 한 거 취소. 아직은 녀석의 선생으로 있고 싶다.


결국 밥풀만 떼서 돌아왔다. 일부러 더 명랑하게 말하니 쵸로마츠가 바보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황급히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 진짜. 그런 반응 하면 이 선생님이 더 힘들어지잖아.


"뭐야, 뭐야~? 쵸로마츠군 무슨 생각 했어?"


"따, 딱히 아무것도...!"


"괜찮아~ 우리 성실한 반장 씨도 사춘기 남자아이잖아? 이런저런 생각할 수도 있지~"


"저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그럼 무슨 생각?"


나랑 키스하는 생각? 뒷말은 채 하지도 못했는데 쵸로마츠가 황급히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몰라요! 다 먹었으니까 이만 갈 거예요! 잘 먹었습니다!"


"혼자 가게? 선생님이 바래다줄게."


"다 컸으니까 필요 없거든요! 그럼 이만!"


다 크기는 퍽이나. 그 붉은 얼굴부터 어떻게 하고 그런 얘기를 해. 씩씩대며 나간 쵸로마츠를 보다가 힘이 풀려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위험했다..."


조금 골려줄 생각이긴 했지만 설마 거기에서 눈을 감아버릴 줄은... 거기다 얼굴 붉힌 채 잔뜩 부끄러워하다니 반칙이잖아. 뒤늦게 열기가 얼굴에 쏠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니 내 얼굴도 붉어졌다는 걸 알리듯이 뺨이 뜨끈뜨끈했다. 쵸로마츠의 붉은 얼굴 처음으로 봤어. 이건 기대해도 되는 거겠지? 쵸로마츠가 앉아있던 곳을 바라보면 아까 그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잊지 못할 쵸로마츠의 표정이 또 하나 생겨버렸다.

쵸로마츠 뺨에 붙어있던 밥풀을 입안에 넣고 혀로 굴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이 어둠긴 해도 쵸로마츠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도 팔다리, 허리가 가늘어 보인다. 저 몸으로 싸움을 했다는 게 믿기진 않지만 아마 성실한 이미지랑 나 때문에 더 빠진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밥을 사줬건만 한참 남은 것 같다.


"쵸로마츠, 언제 다 클래?"


다 커야 선생님이 안심하고 데려갈 텐데.






#2 나와 반장



"흐어... 죽겠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일어나서 학교에 왔는데 의자에 앉으니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오늘 조회 안 가도 되겠지... 어차피 쵸로마츠가 알아서 할 테고...


"마츠노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숙취?"


"술은 좋아하지만 어제는 안 마셨습니다아..."


"그럼 얼굴이 붉은데 감기에요?"


"아, 어제 빠칭코에서 털려서 우산도 못 쓰고 그냥 집까지 뛰어가긴 했는데... 설마 그거때문인가...?"


"그 빗속을요? 마츠노 선생님도 어련하네요."


그렇게 아프면 조퇴해요. 수업은 자습으로 돌리고, 종례는 제가 맡을 테니. 옆 동료의 배려가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물론 진짜 눈물이 나진 않지만. 정말 그냥 집에 갈까 싶었지만 쵸로마츠 녀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 녀석 몸 약한데 걔도 감기 걸린 건 아니겠지. 그리고 감기 걸린 나를 봤을 때의 녀석 반응도 궁금하다. 어이없어할까, 투덜거릴까, 아니면...


"안 돼요. 우리 반 수업은 꼭 해야 해서."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니 모리 선생님은 피식 웃더니 일회용 마스크를 하나 내밀었다. 무리하지는 말아요. 옆 동료의 친절이 따뜻해서 콧물이 날 것 같다. 그리고 진짜 콧물이 난다. 감기 심한가, 나.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의자에 몸을 완전히 맡겼다. 조금 쉬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라..."


아, 이런. 목소리 완전히 갈라졌다. 몸에도 기운이 없어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별수 없이 터덜터덜 교탁을 향해서 걸어갔다. 교탁이 이렇게 멀었던가. 겨우 교탁에 교과서를 내려놓았더니 기침이 연달아 터진다. 아, 젠장. 아픈 티를 이렇게까지 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얼버무리려 몇 쪽 할 차례냐고 묻자 오키무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감기 걸리셨어요?"


선생님은 말이야 그런 악의 없는 질문에 약해. 나는 칠판에 기댄 채 일부러 장난투로 말했다.


"오냐, 감기 걸렸다. 바보는 감기 안 걸린다더니 다 거짓말이야. 너희도 감기 조심해라."


내 말에 아이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선생님이 바보라는 소리잖아요~ 아이들의 말에 나도 따라 작게 웃었다. 너희들도 바보이니 감기 조심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 가능하다는 건 생각 못 하나 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이라는 게 본디 말이 많아 목이 아픈 직업인데 감기까지 걸리니 죽을 것 같다. 애들은 내 노고도 모르고 키득키득 웃어댄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읽었다가는 목소리를 아예 잃을 것 같아서 도중부터는 학생들을 시켰다. 웃는 녀석 시킬 거라고 하니 웃음소리가 줄어들었다.

한 학생이 본문을 읽는 동안 잠시 물을 마셨다. 물이 달다. 이정도면 생명수다, 생명수. 수업에 여유가 생기니 그 녀석, 쵸로마츠 반응이 궁금해졌다. 걱정해주려나. 그냥 수업에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쵸로마츠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딱 눈이 마주쳤다. 살짝 크게 뜨인 눈을 보자마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 걱정해서 계속 보고 있었구나.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나은 것 같다. 물론 진짜 낫지는 않지만. 내가 웃으니 쵸로마츠 눈썹이 평소보다 더 처졌다. 쵸로마츠가 날 저렇게 봐준다면 가끔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취소. 역시 아픈 건 최악이야. 몸이 천근만근이다. 덕분에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기절 잠을 잤다. 그런데 아픈 환자의 잠을 깨우는 건 대체 누구려나. 딩동- 딩동- 여름철 매미 소리처럼 거슬리는 초인종 소리에 짜증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안 사요~"


아, 내 달콤 보이스가 망가졌어. 그런 생각도 잠시 다시 스르륵 잠에 빠져들려는 때였다.


"오소마츠 선생님, 저거든요!"


문을 부술 기세로 쾅쾅 울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꿈에서 덜 깼나. 그래도 노크 소리는 현실인 것 같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어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결국 물에 젖은 걸레 같은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나왔다. 잡상인이면 물건을 사기는커녕 뜯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건 잡상인이 아니라 쵸로마츠였다. 깔끔하게 빗어 내린 머리, 꾹 다문 ㅅ자 입, 단정한 교복까지 어디로 보나 쵸로마츠였다. 쵸로마츠가 여기 왜 있어. 있을 리가 없잖아. 잠에서 깨려 눈을 비볐다.


"이젠 헛것까지 보이나..."


"진짜거든요! 너무하네, 정말!"


목소리마저 쵸로마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진짜 쵸로마츠?"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요?"


가짜일 수도 있지. 널 너무 그리워해서 내가 만든 환상이라든지.


"여긴 어떻게 알고..."


"본인이 알려준 것도 기억 못 해요?


"아, 아... 그랬지, 참. 응... 일단 들어와."


예전에 장난삼아 가출하면 오라고 집 주소를 알려줬었는데 그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 쓰잘데기 없는 소리 말라고 해서 그냥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어쨌든 몸도 아프고, 쵸로마츠도 계속 세워둘 수만은 없어서 들여보냈지만 집 안 꼴을 보자 아차 싶었다. 우리 집 돼지우리였지, 참. 뒤에서 쵸로마츠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삐질 흘러내리는 땀은 감기 때문에 난 땀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집 치울 시간도 힘도 없다. 대충 빨간책들만 침대 밑으로 차서 넣고 침대에 앉았다. 어디 보자. 쵸로마츠는 손님이니 일단은...


"일단 선생님은 누워 계세요."


엥? 뭐라 할 틈도 없이 쵸로마츠는 날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몸은 이렇게 말랐는데 예전에 싸우던 근육은 어디로 안 간 것인지 힘이 제법 세다. 이미 감기와 졸음으로 흐물흐물해진 몸은 저항할 생각도 없다. 얼떨결에 누워서 눈만 끔벅이고 있으니 쵸로마츠는 들고 온 봉투는 식탁에 올려두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하는 폼이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쵸로마츠가 집안일을 하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쵸로마츠랑 살면 이런 느낌이려나. 설거지하려고 고무장갑을 낀 뒷모습이 완전히 새색시다.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된다는 게 가능한 걸까. 기분이 고양되는 것을 느끼며 장난투로 말을 툭 뱉었다.


"쵸로마츠, 여긴 왜 왔어? 나 걱정돼서~?"


"겨울에도 반바지로 돌아다닐 것 같은 사람이 감기 걸렸다는데 걱정이 안 돼요, 그럼?"


즉답. 게다가 답 내용이... 단숨에 열기가 머리로 올라와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걱정은 무슨 걱정이라며 쏘아붙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일 좀 그만 시키라고 하는 그 쵸로마츠가 나 하나 걱정된다고 집까지 찾아와 자처해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 아픈 거 최고. 응, 아파서 다행이다. 그 순간 쵸로마츠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린 쵸로마츠는 거침없이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내 안색을 살피려는 건지 눈높이도 맞춰주었다.


"많이 아파요?"


"헤?"


그만해! 선생님 심장을 쉬게 해줘!


"상태가 영 안 좋은 것 같은데 약은 먹었어요?"


"아, 아니... 그 귀찮아서..."


"하여간. 아프면 약을 먹어야죠. 바보도 아니고 그냥 버티려고 했어요? 약이랑 죽 사 왔으니까 얼른 먹어요."


엄마, 오늘은 나 죽는 날인가 봐. 쵸로마츠는 들고 온 봉투에서 죽 그릇을 가져와 숟가락과 함께 나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긴 했지만 현실감이 떨어졌다. 그 쵸로마츠가 집안일도 해주고 죽이랑 약도 사 왔다니. 장난삼아 먹여달라고 해볼까 하다가 지금 쵸로마츠라면 해줄 것도 같고, 그랬다간 정말 감기가 아닌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아서 관뒀다. 아파서 그런지 별맛 느껴지지 않았지만 쵸로마츠가 날 위해 사 온 것이 고마워서 도저히 남길 수가 없었다. 쵸로마츠는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는지 물컵과 약을 침대 옆에 두고 옆에서 배를 깎기 시작했다. 배도 갖고 온 거냐고! 이 정도면 병문안이 아니라 나 죽이러 온 거 아님? 뭔가 참을 수 없어서 얼른 약을 삼키고 배를 와작와작 베어먹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먹어도 괜찮은지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먹고 나서야 배를 하나 집어 먹는 쵸로마츠가 너무 귀엽기 때문이다.


"빨리 나아요. 선생님이 그러고 있으면 저랑 모리 선생님만 고생하니까."


그렇게 말하면 더 낫기 싫어지는데. 그래도 쵸로마츠가 그렇게 말하면 노력해볼까. 나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남한테 감기 옮기면 낫는다던데~ 쵸로마츠 내 감기 가져갈래?"


장난조지만 사심은 100% 담긴 대사를 말하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패밀리 레스토랑 때처럼. 쵸로마츠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쵸로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우, 웃기지 마요! 내가 왜─앗!"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능청이고 능글이고 얼어 죽을 가면이 단숨에 깨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쵸로마츠의 손을 붙잡았다. 허리를 감싸며 쵸로마츠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넘어져도 침대가 낫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그러나 난 이 판단에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침대에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응?"


순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으아아악!!!"


쵸로마츠의 괴성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쵸로마츠는 울상을 진 채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전이 머릿 속에서 리플레이되었다. 가까이 다가온 쵸로마츠, 그리고 입술에 닿은 말캉한 그것...


"선생님...?"


날 올려다보는 쵸로마츠의 눈동자에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그... 방금 나랑 쵸로마츠가 키스...? 키스한 거지?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는데 상황판단만으로도 벅차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감기 열 때문에 머리가 고장 나버린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만 핑핑 돈다. 어른의 여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으아아악!!"


별안간 쵸로마츠가 또 벌떡 일어났다. 데자뷔를 느끼고 있는데 무언가가 철퍽하고 내 얼굴에 떨어졌다.


"앗, 차가!!!"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뭐야, 이거?! 물수건?! 물수건을 치워버렸을 땐 쵸로마츠는 이미 집 밖으로 나간 뒤였다. 활짝 열려있던 문은 끼이익거리며 천천히 닫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 나는 또다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기운이 쭉 빠졌다. 쵸로마츠가 약도 사주고 물수건을 올린 보람도 없이 열만 더 올랐다.


"망했다. 더 심해졌어."


결국 나는 하루 더 학교를 쉬어야 했다.





#3 나와 너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길게 연기를 뱉었다. 푸른 하늘 위 새하얀 구름들 틈에 회색 연기가 끼어들어간다.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펜스에 기대어 섰다.


머릿 속을 정리해보아도 쵸로마츠를 평소처럼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좋은 아침..."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축 처졌지만 아침이라서, 어제까지 아팠던 걸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절대 어른답지 않게 어제 일에 휘말리고 있어서가 아니니까! 시선을 배회하다가 겨우 쵸로마츠쪽을 보니 내 걱정한 시간이 무색하게 쵸로마츠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자신보다 흥분한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침착해진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끙끙거리며 엎드려있는 쵸로마츠를 보자마자 마음이 사르르 풀려 성큼성큼 쵸로마츠쪽으로 걸어갔다. 둥근 뒷통수에 익숙하게 손을 올린다. 이 가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히는 감각이 그리웠다.


"우리 반장 어디 아픔?"


쵸로마츠의 어깨가 대놓고 튀어올랐다.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손을 떼자 쵸로마츠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매서운 눈초리는 불만을 한 가득 담은 채 나를 향해 있다. 여기서 분위기를 풀어주는 건 어른의 역할이겠지.


"어제 밤에 뭐 했어? 혹시 혼자 딸딸─"


"아니거든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선생님은 다 이해해용~"


"그러니까 아니라니까요!"


"오늘도 반장은 기운이 넘치는구나~"


쵸로마츠는 목소리를 높히며 날카롭게 손을 쳐냈다. 그래, 이래야지 우리 쵸로쨩이지.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쵸로마츠 머리를 쓰다듬고서는 교탁으로 향했다. 응, 이걸로 쵸로마츠 충전 완료. 기운 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나와 반대로 쵸로마츠는 나를 좀 더 노려보다가 다시 또 책상에 엎드렸다. 이상하네, 평소라면 계속 노려봤을텐데. 그러고 보니 아까 쓰다듬었을 때 조금 뜨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 여기 프린트물이요."


"엉, 거기 둬. 수고했다."


"네, 그럼 가볼게요."


"아, 카노우 잠깐만."


"네?"


"이따 반장 좀 불러줘."


알겠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덧붙이자 카노우는 그럴 줄 알았단 식으로 작게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카노우 녀석은 눈치가 빠르니 어느 정도 나와 쵸로마츠 관계도 짐작되나 보다. 뭐, 나와 쵸로마츠 관계라고 해도 아직까지는 이렇다고 할 게 없지만. 스스로 자학 비슷한 것을 하며 지갑을 챙겨서 일어났다. 오늘은 야끼소바 빵 먹을까. 쵸로마츠 도시락은 오늘 무슨 반찬이려나. 고작 하루이틀만인데도 쵸로마츠와 도시락 먹는 게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갑을 가볍게 던지고 받는 걸 반복하며 유유자적하게 복도를 걸었다. 날이 제법 따듯해져 이젠 반팔에 저지만 입어도 덥다. 앞으로는 그냥 반팔만 입고 다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른쪽으로 꺾었다.


"쵸로마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쵸로마츠가 평소보다 큰 도시락통을 들고 복도를 휘청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시선은 평소답지 않게 바닥을 향하고 있고 발을 질질 끌고 있다. 놀라 멈춰서자 쵸로마츠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동자는 살짝 풀려있었다.


"선생님..."


목소리가 걸걸하고 양 볼이 불그스름하다. 설마. 그저께의 일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간다.


『남한테 감기 옮기면 낫는다던데~ 쵸로마츠 내 감기 가져갈래?』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런 말을 한 과거의 나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기분이다. 보건실에 데려갈까? 아니, 그냥 조퇴시키자. 다급하게 쵸로마츠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가니 쵸로마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도망가려는 모습에 가슴이 쓰라리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몸이 균형을 잃고 있었으니까. 도루 하는 야구선수처럼 달려가 쵸로마츠를 받아 안았다. 쵸로마츠가 든 도시락통이 복도에 나뒹굴었다.


"너 괜찮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축 처진 쵸로마츠를 바로 안자 쵸로마츠는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태로 수업 듣고 있었단 말이야? 젠장,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어도. 걱정스레 쵸로마츠를 바라보니 쵸로마츠의 검은 눈동자에 초조해하는 내가 그대로 비추어 보인다. 쵸로마츠는 조심스레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선생님, 나 좋아해요?"


뜬금없이 달려든 말에 말문이 턱 막히었다. 쵸로마츠의 눈동자는 내 마음까지도 비추려는듯이 맑고 투명하기만 하다. 선생님은 말이야 그런 악의 없는 질문에 약해. 나는 쵸로마츠의 눈과 이마를 덮어버렸다.


"역시 열 나네. 너 감기 걸렸지?"


더는 그 올곧은 눈동자와 마주할 수가 없어 쵸로마츠를 업고 걸음을 재촉했다.


"선생님... 수업..."


"괜찮아. 나 6교시 수업말고는 없어서 시간 비어."


"아뇨... 제 수업..."


"그쪽이냐! 아프면 그냥 쉬어, 바보야!"


쵸로마츠는 뭐라 궁시렁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잠이 든 걸까. 걷는 내내 쵸로마츠의 열기가 등을 타고 전해졌다.


"일부러 데려다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뇨, 아뇨. 담임으로서 당연한 일인걸요."


그리고 쵸로마츠가 아픈 게 저때문이고. 뒷말은 싹 잘라먹고 영업용 미소를 내걸었다. 어머니께선 곱게 웃으시며 물수건을 가져와야겠다고 총총거리며 1층으로 내려가셨다. 웃는 모습이 쵸로마츠랑 판박이시다.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쵸로마츠 상태나 확인하고 가려고 조심히 문을 열었다. 분명 소리는 나지 않았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쵸로마츠는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아직 낫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쵸로마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선생님."


"오, 깨웠어? 미안, 미안~"


역시 아직 뜨겁네. 물수건 아직이려나.


"저한테 할 말은 그거뿐이에요?"


올곧은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찌르는 눈빛에 나는 주춤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학생 기세에 밀리다니 나도 늙었구만. 한숨 섞인 웃음을 뱉으며 나는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내가 졌어, 쵸로마츠.


"네 질문의 답은 때가 되면 해줄테니까 기다려."


그렇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쵸로마츠의 눈을 가리며 침대에 도로 눕히자 의외로 쵸로마츠는 고분고분 따라와주었다.


"그게 언제인데요."


"글쎄다."


"비겁해."


"어른은 원래 비겁한 법이지."


기다려줄 수 있어? 조심스레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잠든 걸까. 아니, 이렇게 빨리 잠들 리도 없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 거겠지. 치사한 녀석. 낮게 웃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정말 학교에 가봐야만 했다. 차 한 잔 드시고 가라는 어머니의 호의도 거절하고 어렵사리 발을 떼었다. 계속 있어봤자 쵸로마츠가 편히 쉴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 곁을 지키고 싶었다.


교정 곳곳에 심어놓은 꽃들이 제 빛깔을 마구 뽐낸다. 겨우내 삭막했던 학교가 이제야 살풍경으로 보인다. 아직 봄바람은 차기만 하지만 벚꽃은 금방이라도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일 것처럼 탐스러운 꽃망울을 한껏 부풀이고 있다. 쵸로마츠는 울고 웃으며 학교를 벗어나는 학생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모두가 학교를 떠나가도 그 사람은 학교에 있을 터였다. 두세칸씩 계단을 밟고 올라가 옥상문을 열자 희미한 담배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펜스에 기대어 선 선생님의 모습은 늘 입고 다니던 저지가 아니라 반듯한 슈트 차림이여서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젠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쵸로마츠가 일부러 쏘아붙이듯이 말을 해도 오소마츠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선생님은 모르겠는걸~ 국어교육학과 합격 축하는 충분히 해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일부러 능청스럽게 말꼬리를 늘리는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는 인상을 썼다. 일단은 국어 선생님이라는 인간이 제 말의 뜻을 모를 리는 없었다.


"당신 이제 내 선생님 아니잖아."


선생님과 제자. 오소마츠가 답지 않게 이 관계를 신경쓰고 있다는 건 쵸로마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등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존심도 뭣도 버리고 오소마츠와 1 대 1 과외도 받고 상담을 하며 겨우 오소마츠와 똑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합격했다. 말은 못 해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달라고.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라인에 섰다.


"헤에~ 어른한테 하는 말버릇 보소~ 이젠 네 선생님 아니어도 어른은 어른이거든요? 이런 애가 선생님이 된다니 일본의 미래가 걱정이다, 걱정."


"당신같은 사람도 선생님 되는 판국에 무슨!"


"어이쿠, 무서워라."


쵸로마츠는 제 화에 못 이겨 졸업장통을 던져버렸다. 오소마츠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졸업장통을 주워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쵸로마츠가 2년 간 노력한 성과인지 눈높이도 제법 비슷해져있었다.


"우리 쵸로마츠 많이 컸네."


"이제 애 취급 좀 그만─"


쵸로마츠는 더 말을 못 잇고 다급하게 오소마츠를 붙잡았다. 빠르게 입 안쪽으로 침투해오는 혀에 쵸로마츠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애 취급은 이제 됐다고! 바짝 약이 올라 나름 대응해보려 해도 경험 있는 자가 경험 없는 자에게 밀릴 리가 만무했다. 혀, 볼 안쪽, 치열, 입 천장이 탐해질 때마다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쵸로마츠는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채찍질하며 오소마츠 목에 팔을 감았다. 조금 열은 받지만 청춘의 마침표를 찍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이 모자랄 즈음, 오소마츠가 만족스러운듯이 웃으며 입술을 떼었다. 쵸로마츠는 숨을 몰아쉬며 눈물이 맺힌 눈가를 훔쳤다.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자 오소마츠는 더 얄궂게 웃으며 속삭였다.


"역시 덜 컸네."


"읏... 비겁해... 갑자기 키스하고."


"어른은 원래 비겁한 법이라니까?"


너도 이젠 어른이지만. 졸업장통을 쥐어주며 하는 말에 쵸로마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졸업이다. 나도 이제 어른이다. 그렇다면... 쵸로마츠는 똑바로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좋아한다, 쵸로마츠."


"오소마츠, 좋아해요."


마치 짠 것처럼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은 새콤달콤하기만 하다. 좋았으! 선생님이 한 잔 산다! 오소마츠는 기세 좋게 쵸로마츠의 손을 잡아끌며 계단을 내려갔고, 쵸로마츠 역시 그 손을 맞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이젠 선생이 아닌, 반장이 아닌 대등한 관계로서 이렇게 손을 잡은 채 똑바로 나아갈 것이었다.




공백 미포함 11,704자


얍! 저번에 썼던 선생님과 반장과 우리 시리즈의 오소마츠 시점입니다! 보셨으면 아실테지만 내용 전개는 똑같고 말 그대로 오소마츠 시점으로 쓴 것뿐이에요. 프완님께 선물로 드렸던 글인데 프완님이 웹 공개 해도 된다고 하셔서 내용 보태서 올립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이렇게 많이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 가볍게 썼던 건데... 그래도 좋아하시는 분들이 제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아요

ㅎㅎ 오소마츠 시점인 이 글도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시험이라... 다음 글은 시험 끝나고 올리는 것으로........................

그럼 모두 안녕히 주무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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