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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나 네 이야기가 듣고 싶어!


이 대화는 두 사람만의 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쵸로마츠가 들고 다니던 크고 두꺼운 책은 어느 새인가 그저 소지품으로 전락해버렸다. 가족들의 이야기, 오빠와 동생들의 이야기,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이야기, 돈을 벌기 위해 상인단에 들어간 이야기, 도적단의 습격을 받은 이야기, 겨우 도망쳐 나와 우연히 한 마을에서 꼬마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것을 계기로 이야기꾼이 된 이야기, 이야기꾼으로서 여행을 해온 이야기 등... 가상의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달리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쵸로마츠를 오소마츠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양피지에 쓰지 않은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오소마츠가 일을 하는 시간 또한 길어졌다. 돌변한 왕자의 태도에 왕궁은 뒤집어졌다. 측근들은 왕자의 마음이 변할세라 서둘러 안건들을 처리하기에 바쁘고, 시종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에 바빴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듣고 교훈을 얻은 것이다, 세헤라자데와의 사랑의 힘이다 각종 소문이 무성했다. 그걸 다 듣고 있는 소문의 주인공은 베일로 표정을 숨긴 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러 갈 뿐이었다.


"오늘은 제가 왕자님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쵸로마츠가 들어오자마자 하는 생소한 말에 오소마츠는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소마츠의 시선을 꿋꿋하게 받으며 쵸로마츠는 늘 앉던 의자에 앉았다. 항상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가던 책은 어째서인지 오늘은 없었다. 오소마츠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쵸로마츠가 입을 열었다.


"집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뭐?"


오소마츠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쵸로마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말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미성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흐트러져 있었다.


"집에 완전히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왕자님 명령없이 저따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왕자님도 그동안 제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오랫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 했다는 것을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가족을 보지 못 해 그립고, 또─"


"자, 잠깐만. 잠깐만, 쵸로마츠!"


오소마츠는 다급하게 쵸로마츠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라고 해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늘 바람처럼 움직인 그녀가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쵸로마츠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 열심히 일도 했는데. 얼굴을 찌푸리던 오소마츠는 자신의 손등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빙하처럼 차갑기만 하던 쵸로마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희, 어머, 니가... 돌아, 가셨다고..."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소마츠는 반사적으로 쵸로마츠를 껴안았다. 가슴팍에 울고 있는 그녀를 숨겼다. 평소였으면 싸대기가 날아오고도 남았을 텐데 오히려 제 옷자락을 붙잡고 오열하는 쵸로마츠에 오소마츠는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울지 마. 이 흔한 말 한 마디조차도 할 수가 없어 오소마츠는 그저 쵸로마츠를 더 세게 안아주었다.

쵸로마츠의 말대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왔으니 아주 잘 알고 있다. 쵸로마츠가 얼마나 가족을 아끼는 지를.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면 온화해졌고, 오빠나 동생 이야기를 할 때는 툴툴거려도 말 속에 애틋함이 숨어있었다.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때때로 곱게 접히는 눈을 오소마츠는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악감에 가슴이 옥죄어왔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작에 의원을 보냈어야했어. 적어도 시종을 보내서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게 했어야 했다. 칭찬 받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지만 않았다면, 쵸로마츠의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기로 듣지만 않았더라면... 뒤늦은 후회에 까드득 이가 갈렸다.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현재로선 쵸로마츠를 안아주는 것외에는 불가능하기에.


쵸로마츠의 오열은 계속 되었다. 그녀가 지쳐 잠들기 전까지. 오소마츠는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아침 해가 눈부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쵸로마츠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은 잘 떠지지도 않고 목이 몹시 말랐다. 바짝 타버린 입과 혀로 겨우 침을 모아 삼켰다.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로 쵸로마츠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햇살덕분에 훤히 보이는 방 풍경은 낯선데 어쩐지 익숙했다. 여기 어디지. 아직 수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한 머리로는 생각하는 것도 버거웠다. 등이 푹신푹신하고 이불이 부드러워... 조금만 더 자고 싶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려던 찰나, 한 가지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쓰던 침대가 이렇게 편안했던가?


"응?!"


쵸로마츠는 두 눈을 번쩍 뜨고는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으로 머리를 짚고 다시 방 안을 둘러본 쵸로마츠는 또 다시 침을 삼켰다. 여긴 왕자님 방이잖아. 늘 어두운 밤에만 왔던 터라 쉬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 어제 여기 와서... 왕자님께 말씀드리다가... 결국... 쵸로마츠가 기억을 더듬을 수록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갔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일어났어?"


"으왓!"


깜짝 놀라 쵸로마츠의 어깨가 튀어올랐다. 반사적으로 이불을 코까지 끌어당겼지만 이 침대의 주인과 목소리의 주인이 같다는 걸 깨닫고 황망히 내렸다. 오소마츠가 낮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어쩌지? 일어나야 하나? 그렇지만 왕자가 곁에 앉았는데 벗어나는 건 예의가 아닌가? 그렇지만 이 침대는... 쵸로마츠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눈만 깜박였다. 잠에서 막 깬 데다가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에 머리가 쉬이 돌아가지 않았다. 쵸로마츠가 자신하던 포커페이스는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베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오소마츠가 진작에 벗긴 것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침착하자. 침착해, 쵸로마츠. 쵸로마츠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일단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왕자가 한 일이 터, 그렇다면 다른 이의 눈에 띠지 않는 한 아직은 있어도 괜찮을 것이었다. 지금 당장 해야할 것은 왕자에게 지난 밤 추태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서둘러 이 곳을 뜨는 일이다. 곧 있으면 왕자의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올 거다. 안 그래도 궁 안에 별의별 소문이 도는데 왕자와 지난 밤부터 아침까지 있었다는 게 들킨다면? 그것도 침대에 누워있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돌지 안 봐도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벅차. 쵸로마츠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뿌리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왕자님, 어제 밤에는..."


"잘 잤어?"


그리 물으며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눈가를 매만졌다. 역시 좀 부었네. 장난끼가 섞인 눈동자에선 꿀이 떨어지는 듯 했다. 쵸로마츠가 짧게 딸꾹질을 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된데다가 당황스러운 나머지 쵸로마츠는 그 손을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뒤늦게 깨닫고 몸을 물리자 오소마츠는 작게 키득이며 웃었다. 쵸로마츠는 서둘러 근처에 있던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엉켜있고, 옷도 엉망이었지만 자세만큼은 꼿꼿했다.


"어제 밤의 무례는 정말 죄송─"


"─마차, 준비해뒀어."


"예?"


오소마츠는 빠르게 눈을 깜박이는 쵸로마츠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일단 씻고 밥 먹을까?"


"왜!"


"왕자님."


"어째서!"


"시끄럽습니다."


"내가 준비한 마차 안 타는 거야?!"


어린 애처럼 떼를 쓰는 오소마츠를 보고 쵸로마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신들은 안절부절 못 해하며 그 곁을 지켰다. 최근 왕자님이 좀 철이 드는가 싶었건만 어제 새벽에 갑자기 마차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선 아침에 세헤라자데와 함께 등장. 지금은 또 예전처럼 어린 애처럼 굴고 계신다. 가신들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머리가 아팠다. 이 상황이 즐거운 것은 오로지 소문을 부풀리던 시종들뿐이었다. 쵸로마츠는 책 한 권과 간단한 짐을 잠시 바닥에 놓고 오소마츠의 눈 앞에서 짧고 강하게 박수를 쳤다. 오소마츠가 놀라 말을 멈추자 쵸로마츠는 짐짓 허리에 손을 얹었다.


"왜긴요. 왕궁 마차는 너무 눈에 띕니다. 거기다 시종들도 안 붙여줘도 됩니다. 혼자 움직이는 게 더 편하고, 수도에는 상인단이 많이 모이니 그 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상인단 마차를 얻어타면 됩니다."


"그치만 그런 상인단 마차보다 왕궁 마차 훨씬 편하다구? 쵸, 아니 세헤라자데네 집까지 단숨에 갔다올 수도 있다구? 그리고 선물도 이렇게 많이 준비했는데 혼자서 어떻게 들고 가려구!"


한 쪽에 그득히 쌓인 선물들을 위아래로 살펴본 쵸로마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놓은 책은 옆구리에 끼고 선물더미를 뒤적이며 몇 개만 골라 제 짐에 넣기 시작했다. 조그마하던 보따리는 제법 커져 둥그래졌다.


"쓸데없는 것도 섞여있지 않습니까. 필요한 것만 들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왜? 다 가져가서 가족들이랑 다 나눠갖고..."


"왕자님, 그렇게 눈에 띄면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더이상의 말은 안 받겠다는듯이 쵸로마츠는 한 글자씩 힘주어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누군가의 표적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들은 이야기가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려주고 있었다. 도적단.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도, 쵸로마츠의 이야기 속에서도 나오는 존재. 알고 있어. 알고 있기에 일부러 준비한 건데. 오소마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삐딱하게 섰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꼭 자신을 약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억지로 붙잡는 수도 있다. 왕자니까, 주변에 부하들이 있으니까 명령만 내리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궁 안에만 있던 자신보다 여러 곳을 돌아다닌 쵸로마츠쪽이 현실을 더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움 받고 싶지 않은걸."


"예?"


"아무것도 아냐! 해산! 해산!"


오소마츠가 양 팔로 허공을 붕붕 휘젓자 서로 눈치만 보던 가신들은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몇몇 시종들은 몰래 남아 오소마츠가 하염없이 쵸로마츠가 떠난 곳을 바라보는 것을 훔쳐보았지만 말이다. 모래들이 야금야금 쵸로마츠가 남긴 발자국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떠난 이야기꾼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오소마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쵸로마츠? 오소마츠는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강렬히 내리쬐는 햇살은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뜨겁기만 했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오소마츠는 한 쪽 팔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그의 수신호를 눈치채고 근처를 지키던 시종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세헤라자데를 따라가. 절대로 들키지 말고 가족들과 만나게 해줘. 그리고 만약 세헤라자데가 이 곳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데려오고. 알겠어?"


"본부 받들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굽힌 시종은 이미 출발한 쵸로마츠를 따라잡으러 급히 발을 놀렸다. 쵸로마츠처럼 점점 멀어지는 시종을 보며 오소마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해, 쵸로마츠.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난 네가 내 곁을 떠나는 엔딩은 보고 싶지 않아.


"나에게 돌아와줘."


오소마츠는 작게 중얼거리고선 쵸로마츠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왕궁으로 돌아갔다.


"있지..."


"네, 왕자님."


"거기 그렇게 멀어?"


"마차를 타면 하루이틀이면 갔다 올 수 있긴 합니다만..."


거기가 어디인지도 말 안 했건만 가신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가득히 쌓인 서류를 슬그머니 치우며 가신은 오소마츠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예전과 달리 놀지 않고 책상에 앉아있는 것은 좋으나 쵸로마츠가 떠난 이후는 책상에 엎어져있기만 한다. 일은 원래 안 했었으니 예전 생각을 하면 말썽 안 피우고 얌전히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계속 기운이 없으니 이건 이거대로 문제였다. 거짓말을 조금 섞으면 옛날 활기찬 왕자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말씀만 하시면 마차를 준비시키겠단 가신의 말에 오소마츠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아니, 아니다. 됐어."


"최근 보고에 따르면 함께 가기로 한 상인단이 왕궁까지 우회하는 길로 간다고 하니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만..."


"됐다니까 그러네! 괜찮다니까!"


오소마츠가 책상을 내리치며 황망히 일어나자 가신은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당장이라도 나가라고 할 것 같았던 오소마츠는 가신을 노려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뒤로 넘어간 몸을 붉은 의자가 소리 없이 가뿐히 받았다.


"...최근 보고는 그게 다야?"


"네..."


"그게 며칠 전인데?"


"그것이... 아."


"와, 왕자님!"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은 발을 헛디뎌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왕자의 집무실에서 이 무슨 소란인지 호통이 내려쳐야 마땅했으나 정작 왕자인 오소마츠는 서둘러 그 시종을 부축했다. 쵸로마츠에게 보냈던 시종이다. 마지막 보고가 도착한 셈이다. 땀과 모래가 뒤섞여 엉망이 된 시종은 황망히 엎드리며 오소마츠 앞에 머리를 수그렸다. 모습과 태도에 오소마츠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를 재촉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 꼴은 다 뭐야. 쵸로, 아니 세헤라자데는 지금 어디있지?"


"그, 그것이..."


시종이 말하기를 주저하자 오소마츠는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난생 처음 보는 왕자의 화내는 모습에 시종은 바닥에 붙을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돌아오는 길에 도적단을 만나서 그만...!"


"뭐?"


"저, 저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저 혼자만 이렇게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왕자님!"


오소마츠는 일언반구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근처에 장식으로 놓여진 검을 빼들었다. 높게 들린 은회색의 검은 강렬한 태양빛을 반사시키며 날카롭게 빛났다. 근처에 있는 가신은 미처 막을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헛숨을 들이키고, 시종은 죄스럽다는듯이 바들바들 떨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휘두를듯이 오소마츠는 칼을 든 손에 힘을 더했다.


「왕자님.」


문득 스쳐지나가는 목소리에 분노로 가득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하필 이때 이게 떠오르는 거야. 이야기가 끝나고 교훈을 짚어주는 순간. 그때는 책만을 바라보던 쵸로마츠가 유일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고요히 내려앉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칼을 붙잡은 손을 붙잡는다.


「분노를 함부로 행하지 말라. 부정적인 감정으로 출발한 일은 이 이야기처럼 부정적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화가 나도 잠시 멈춰서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폭력이 아닌, 묘안이 떠오르실 겁니다.」


"쵸로마츠."


딱딱한 쇠붙이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나뒹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손으로 오소마츠는 마른 세수를 했다. 네가 들려준 이야기, 제가 알려준 교훈들, 네가 해준 말들이 나를 이끌어. 이어지는 침묵에 시종이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구름이 해를 가렸는지 오소마츠 위로 그늘이 졌다. 어두운 얼굴로 오소마츠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열기가 가신 눈동자는 한결 투명해졌다.


"지금 당장 기사단을 불러라. 세헤라자데를 구하러 간다. 너는 도적단에게 습격당한 곳으로 안내하도록 헤."


"네, 넵! 알겠습니다, 왕자님!"


시종은 바닥에 이마를 박을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혼자 있고 싶다는 오소마츠의 말에 곁을 지키던 가신도 조용히 물러섰다. 오소마츠는 허리를 굽혀 칼을 집어들었다. 반질반질 광이 나는 날붙이에 고요하게 잠긴 붉은 눈이 비치고 있었다.


하늘이 새파랗다. 오늘도 변함없이 강렬한 태양을 노려보며 쵸로마츠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씨 하나는 더럽게 좋네. 마차가 돌부리라도 밟았는지 마차가 크게 흔들리자 구멍이 뚫린 천막도 펄럭였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도적들이 재미있다는듯이 크게 웃는 소리가 뒤섞인다. 몸을 움직이자 상반신과 발목을 꽉 묶은 밧줄이 피부를 할퀴어댄다.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을 쭉 살펴보고 쵸로마츠는 잠시 숨을 들이마쉬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몇 번째여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엔 어떻게 해야할까. 머릿 속을 돌아다니는 가지각색의 이야기들 속에 해결책이 있을 터.


"뭐야!? 아악!!!"


돌연 비명소리가 내리친다. 곧이어 마차가 쓰러지고 남녀노소의 비명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다. 맨살이 바닥에 쓸리고 찰과상이 생긴 부분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뭐야. 다른 도적단이 또 습격하기라도 한 거야? 쵸로마츠는 몸을 일으키니 태양빛이 눈을 덮쳐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여어, 쵸로마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쵸로마츠가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쵸로마츠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역금방이라도 손을 쳐낼듯이 인상을 쓰던 쵸로마츠는 믿을 수 없다는듯이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위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는 아니지만 낙타 탄 왕자도 제법 괜찮지?"


"참신하긴 하네요."


희미하게 웃으며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손을 맞잡고 낙타 위로 올라탔다. 쵸로마츠의 팔을 제 허리에 감은 오소마츠는 꽉 잡으라고 말하고는 비장하게 칼을 높이 들었다.


"백성들은 보호하고, 도적들은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예!"


자칫 큰 싸움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었지만 왕자의 등장때문인지 도적단의 기세는 단숨에 수그러들었다. 결과적으로 도적단들은 모두 생포했고,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권력과 군력의 힘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오소마츠는 쵸로마츠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특별한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그저 뒤에 쵸로마츠를 태우고 묵묵히 나아갔다.


"왕자님."


"..."


"왕자님."


"...왜."


"...이제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


"..."


그리고 왕궁에 도착한 뒤에도 그대로. 아까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디로간 것인지 또다시 애처럼 떼쓰는 모습에 쵸로마츠는 한숨을 쉬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도 뒷 모습밖에 안 보이고, 손을 떼려고 해도 손을 꽉 붙잡은 채 놔주지 않는다. 뭐라 말해도 싫다는 말만 반복하니 쵸로마츠는 차라리 입을 닫았다. 낙타 발굽이 모래 위를 쓸고 가는 소리가 적막하다.


"...이야기 하나 할까."


적막 속에 슬며시 말 한 마디가 스며든다. 쵸로마츠는 대답 대신 오소마츠의 등에 기대었다. 귀를 붙이고 있으면 숨소리나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한 왕자가 있었어. 어느 날 그 왕자는 어떤 이야기꾼을 만났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눌 수록 왕자는 그 이야기꾼에게 빠져들었어. 그런데..."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마치 놓는 순간 떠나갈 것이 무섭다는듯이.


"...이야기꾼이 왕자의 곁을 떠나갔어. 돌아오지 않았어."


"...왕자님."


"응?"


"이야기하는데엔 영 소질이 없으시네요."


"뭐야?!"


울컥한 오소마츠가 순간 손에 힘을 풀자 쵸로마츠는 재빨리 낙타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옷자락과 긴 머리칼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옷 매무새를 정리한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노려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데도 기백이 느껴져 오소마츠는 고삐를 움켜잡았다.


"이야기에 기대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그게 왕자님다워요."


당돌한 말에 주문처럼 오소마츠가 굳은 얼굴을 풀고 웃음을 터트렸다. 응, 그렇네. 나답지 않았네. 오소마츠는 풀쩍 뛰어 낙타 위에서 내려왔다. 


"있지, 쵸로마츠. 왜 시종만 보낸거야? 너만이라면 데려올 수 있었는데 네가 버텼다며."


"그럼 거기서 저 혼자만 삽니까?"


"너 예전엔 혼자 나왔다며."


"그야 그때는 누굴 챙길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뒤돌아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 쵸로마츠의 발걸음을 따라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모래가 가벼이 날리고 마치 보석처럼 그녀의 주변에서 반짝인다. 오소마츠는 작은 발자국에 위에 큰 발자국을 새로 새기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서로의 발자국이 완전히 포개졌을 때 쵸로마츠는 뒤를 돌아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살포시 웃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왕자님이 있잖아요. 구하러 올 줄 알았어요."


스스로 베일을 벗은 맑은 미소는 오소마츠의 눈에 아로 새겨졌다. 오소마츠는 쵸로마츠를 힘껏 껴안았다. 작은 어깨를 제 품에 가두고 풍성한 머리카락에 제 얼굴을 묻었다. 자신보다 작은 몸을 소중하게 보듬었다.


"무서웠어. 널 영영 잃는 건 아닐까 무서웠어."


오소마츠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젖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그를 마주 안으며 등을 쓸어주었다. 어린 아이를 어르듯이 부드럽게.


"그러셨군요."


"나 쵸로마츠가 없는 미래따위 상상도 안 가. 쵸로마츠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항상 내 곁에 있어줘."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와 살짝 떨어졌다. 얼굴은 마주하고 있었지만 오소마츠는 시선을 이리 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쵸로마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오소마츠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이 이야기의 엔딩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우물쭈물한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심스레 양뺨을 감싸고 나서야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와 눈을 맞추었다. 태양처럼 붉은 눈동자를 보자 쵸로마츠의 눈꼬리가 야살스럽게 휘었다.


"이런 이야기의 마지막은 당연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잖아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정해져있죠? 쵸로마츠는 뒤꿈치를 들어 입을 맞추었다.



공백 미포함 7,937자


작년 12월에 올리고 이제야 완결 짓는 나새끼... 심지어 마음에 들지도 않아요... 급마무리...

허엉ㅠㅠㅠ 잊고 있던 건 아닌데 이게 너무 안 써져서 다른 글이나 먼저 써볼까~ 하고선 한 편, 두 편... 그리고 개강을 하고... 이젠 중간고사가 코 앞이고...

그냥 드롭할까도 생각했는데 6천자정도 써놓은 시점에서 콱 막힌 거라서 버리긴 아깝고, 그래서 이렇게 급 마무리 지었습니다.

처음엔 애 같은 왕자 오소랑 연륜이 넘치는 세헤라자데 쵸로가 보고 싶어서 시작한 글인데... 어... 그게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일단 오소가 애 같기는 하다...


아무튼 하... 신경쓰였던 걸 마무리 지어서 좋네요!

아! 글 잘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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