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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로마츠 side



오소마츠형을 향한 마음을 자각한 게 그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마음 처음부터 없었던 게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중학교 졸업식 때 자각해서 내 바뀐 모습을 흔히 말하는 '고교데뷔'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등교 첫날부터 나는 지겹게 입고 다니던 후드를 벗어던지고 교복을 반듯하게 차려입고선 가장 먼저 등교했다. 이 마음을 끝내기엔 단순히 '형'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성에, 형제에, 같은 얼굴임에도 좋아하는 거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호칭 하나로 바뀔 마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악동으로 자라나 아는 게 적은 나로서는 이 정도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오소마츠형을 향한 마음을 없애야한다.

→같이 있으면 자꾸 두근거린다.

→떨어지자.


...스스로도 단순하다고 생각은 한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형제라서 매일 얼굴 부딪히며 살 수 밖에 없지만 우리에겐 학교가 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는 떨어져 지낼 수 있다는 거다. 머리만 잘 쓰면 떨어져있는 시간을 방과후까지 연장시킬 수도 있고, 천만다행으로 반도 다르다. 허나 상대는 오소마츠. 마찬가지로 반이 달랐던 중학교 때에도 뺀질나게 우리반에 온 녀석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내가 피하는 수 밖에. 그러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고 따라서 나는 모범생의 탈을 뒤집어썼다. 악동과 모범생.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 타격은 그대로 나에게 왔지만. 평소 자던 시간에 일어나고, 불편한 교복을 제대로 입고, 수업시간에 자지 않는 것도 모자라 공부까지 해야한다. 스트레스 해소로 싸우는 것도 당연히 금지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인 생활에 금방 적응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절박했다. 뻑뻑해진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매일매일을 버텨냈다. 이 마음이 없어져 언젠가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석의 옆에 설 수 있는 날을 그리며.


* *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지난 15년간의 생활이 고작 1, 2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 다른 녀석들도 다 현재의 나에게 익숙해졌다. 이젠 지난 15년이 완전 흑역사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어떻게 그렇게 철없이 살았던 건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철없는 사람을 아직도 좋아할 수 있는 거지.


"아아아...."


아무도 없다고는 해도 일단 도서관이라 소리를 죽여 절규한다. 3년이 되어가는 이 짝사랑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새해가 되고, 졸업이 가까워져도 이 빌어먹을 대가리는 그 인간 생각밖에 안한다. 돌겠다. 나는 벽에 머리를 쾅쾅 박았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내가 머리 박는 소리만 들린다. 아니, 아니, 아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성실한 모범생이 되었고, 성적도 많이 올랐고–중학생 때 성적이 괴랄적으로 낮긴 했지만–, 떨어져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늘리기 위해 이 도서부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솔직히 오소마츠형이 나쁘다. 내가 이렇게 되었어도 점심시간마다 찾아오는 건 그대로고, 뭐 빌려도 맨날 나한테만 빌리고, 오소마츠형이 사고 치면 정상인인 나한테 바로 이야기 들어오고, 그 뒷처리랑 치료 내가 하고! 어떻게든 얽히게 되는 바람에 노력하는 보람이 없다고나 할까. 거기다 치료를 할 땐 다들 내 잔소리가 시끄러우니까 나가있는 탓에 단 둘이 되버린다. 그 상태에서 고맙다고 웃는데 그건 정말...


"반칙이야..."


알고 있다. 이런 건 변명에 불과하단 걸. 오히려 반칙인 건 나인지도 모른다. 형제이자 파트너로서 날 좋아해주는 오소마츠형에게 이런 마음을 품었으니. 답답해져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날이 지날 수록 마음이 없어지기는 보다는 그저 숨기는 것에만 능숙해지는 것 같다. 숨기는 것보단 무시하는 것에 가깝지만. 이런 마음따위 없다며 모르는 채 행동하다 보면 지금처럼 혼자가 되었을 때 봇물터진 듯이 흘러나온다. 도서관에 있는 이 시간은 내가 숨을 돌리는 시간이자 새삼스레 연심을 자각해 자괴감에 빠져드는 시간이다. 언제쯤 끝이 날까. 끝이 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불안감이 엄습해올 쯤에는 타이밍 좋게 종이 울린다. 6시. 도서관 닫을 시간이다. 나는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 문을 잠그며 내 마음도 깊숙이 넣어버린다. 현실로 돌아가는 거다. 운동부의 기합소리를 멀거니 들으며 저녁노을빛으로 물든 복도 위를 걸었다.


* * *


역시 겨울이다. 이제 겨우 6시인데 벌써 캄캄하다. 골목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매일 매일이 비슷하다보니 하교할 때가 되어서야 '아, 이렇게 시간이 흘렀구나'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후우하고 일부러 숨을 내쉰다. 입김이 뿜어져나오더니 흩어지며 사라진다.


"추워."


따뜻한 곳에 있다가 나오니 저절로 몸이 떨린다. 얼른 손바닥을 비비고 목도리와 코트를 여몄다 안그래도 찬 체질이라 겨울이면 곤욕을 치른다. 아아, 빨리 집에 가서 코타츠 속에 들어가고 싶다... 아쉬운 대로 핫팩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춥다. 매서운 찬바람의 재촉을 받아가며 빠르게 걸어갔다. 귀가 금새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센터시험이고 겨울이고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쬬로마쯔으~"


"컥!"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만 갑자기 누가 내 목을 졸랐다. 어젯밤 뉴스에서 봤던 사건사고들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간다.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뭣, 누구?!"


"에잉~ 너무해랴~ 이젠 횽아도 못알아보는 거양?"


횽아? 고개를 돌리니 양볼이 새빨간 오소마츠형이 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 사이로 알코올 냄새가 풍겨나왔다.


"윽! 술냄새?! 오소마츠형 설마 술먹었어?! 어째 발음이 이상하다 싶더니만!"


"아~ 어쩌다보니까 쪼금?"


"쪼금 좋아하시네! 완전 취기 돌고 있는 상태잖아! 오소마츠형이 막나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다하다 이젠 술까지 손 댄거냐!! 우리 아직 미성년자라고!!! 그리고 겨울날에 술 마시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기나 해?!"


"괜찮아~ 치비타네 놀러갔다가 아저씨가 주시길래 진짜 쪼~금 받아먹은 거 뿐이니깐~"


"아저씨가?"


"엉. 치비타가 자기가 만든 어묵 좀 맛봐달라고 불러서 걔네 집에 갔는데 말야~ 분위기 불타올라서~ 이야, 그 녀석 어묵 엄청 맛있다구? 그래서 이렇게 싸왔다~"


짜잔~하고 검은 비닐봉지를 내미는 모습은 순수 그 자체였다. 그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친구들이랑 술 마신 게 아니라 어른이 있는 곳에서 마셨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치비타는 믿을 만한 녀석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기온에 술이라니.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하고 있던 목도리를 오소마츠형에게 둘러주었다.


"헤? 뭐야, 뭐야?"


"술 취한 상태로 이 추위 속을 걸어다니면 위험하다고. 더워도 그거 꼭 하고 있어, 바보형."


오소마츠형은 목도리를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엔 숨이 턱 막혔다. 자주 웃는 오소마츠형이지만 이렇게 풀어지듯이 웃는 일은 거의 없다. 카라마츠와 마찬가지로 그래도 형이라고 폼을 잡는 것이겠지. 그런 형이 지금 내 앞에서 저렇게 웃고 있다니. 어떡해. 귀여워. 도서관 문과 함께 잠근 마음이 덜컥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목도리를 벗은 탓에 찬바람이 맨살에 바로 닿는데도 체온이 올라서 추운 걸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이건 반칙이다. 확실히 반칙이야. 가장 방심하고 있는 시간대에 기습공격이라니 완전 크리티컬 히트다. 나는 코트를 최대로 올리며 먼저 걸어갔다. 지금 당장은 표정관리가 안된다. 내 뒤를 오소마츠형이 쫄래 쫄래 따라왔다.


"헤헤헤, 쵸로마쯔으~"


"왜."


"쪼로마쯔, 쪼로마쯔~"


"왜."


"쵸로쨩~"


"왜 이렇게 불러대! 대체 몇번을 부르는 거야!"


"푸흐흐."


아, 진짜 하지 말라고 그런 거어어!!! 귀엽단 말이야!!! 담벼락이라도 내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위험한 표정이라 손으로 얼굴을 감싸 가려버렸다. 지금 내 얼굴 붉겠지. 오소마츠형이 그냥 추워서 이런 거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하~ 이런 거 오랜만이네."


"뭐가."


"쵸로마츠랑 같이 하교하는 거."


둔탁하게 머리를 때리는 말에 손가락 틈으로 오소마츠형을 엿보았다. 오소마츠형은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씁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말 못할 질문들이 솟아난다.


"중학교 땐 매일 같이 하교했었지~"


"..."


"게임센터도 많이 가고."


"..."


"그러다 웬 녀석들한테 걸려서 싸우기도 하고."


"..."


"둘이서 잔소리도 엄청 들었지~"


"..."


"...기억나? 쵸로마츠."


"...기억나."


"그래..."


감정이 울컥 치솟아서 이를 악물었다. 내가 길 한복판에 멈춰선 것을 눈치 못챘는지 오소마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어깨가 평소보다 처져있었다. 왜 거기서 말을 끊는 건지 모르겠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외롭다고, 같이 놀아달라고. 평소에 노래부르던 그 말들을 왜, 지금, 이 상황에 하질 않는 거야. 오소마츠형의 뒤를 따라 걸으며 손을 뻗었다. 형이라고 폼 잡는 거야 뭐야. 말해줘. 파트너잖아. 그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만든 건 나잖아.


머리 속에 울린 목소리에 온 몸이 급속히 차가워졌다. 타이밍좋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랬다. '형'이란 지위를 자각시킨 것도, 외롭게 만든 것도 전부 나다. 내 마음 하나 없애자고 오소마츠형의 마음을 무시한 것도 나다. 발걸음이 멈추니 자연스레 오소마츠형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기다리라고 말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고, 옆으로 가려하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소마츠형은, 오소마츠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을 찌른다. 말해달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말할 자격도 없다, 나는. 그렇다면 그냥 계속 이대로 지내야하는 걸까.


"쵸로마츠?"


한 마디로 모든 생각들이 뒤로 물러난다. 오소마츠형은 나를 보곤 눈이 커지더니 곧장 내게 달려왔다. 어라, 나 지금 무슨 표정이지. 얼굴에 손을 대려는 차에 오소마츠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추워서 그래? 응?"


섬세함 하나 없이 그저 칭칭 감기는 목도리에 얼굴이 파묻힌다. 살짝 내려 눈만 내놓으면 안절부절 못해하는 오소마츠형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가 비치는 새까만 눈동자는 영락없는 '형'의 것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저런 깨끗한 눈이 아니었던 걸까. 정말 울 것만 같아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얼마나 거리를 벌려도, 밀어내도 오소마츠형은 다가올 것이다. 내 형이니까. 그것이 어찌나 안심되고 또 아픈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오소마츠형을 보며 살짝 웃었다.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도 얼른 어엿한 동생이 될테니까. 기약하지 못할 말을 입 안에서만 웅얼거렸다.


* * *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단순히 거리를 두는 것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 책 등을 뒤져서 실연을 극복하는 법을 찾아봤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슬픈 음악 듣기?

아무리 들어도 시끌벅적한 집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다 깨진다.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기?

지금 이 모범생이라는 캐릭터자체가 내겐 새로운 시도였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랑을 찾기?

그딴 거 가능하겠냐! 망할 저자!!


짜증을 내며 수첩에 엑스자를 쫙쫙 그었다. 애초에 대부분 일반 남녀가 사귀다 헤어진 상황을 가정한 터라 내게 맞을리가 없었다. 형제를 사랑해버렸다는 터무니 없는 상황에 대한 해결방안은 그 어떤 책에도 나와있지 않을 테지. 수첩을 덮고 서점에서 나왔다. 하교 시간의 상점가는 사람이 많아 소란스럽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남학생들과 여학생들, 그리고 커플. 칫. 혀를 차고서 일부러 커플들과 반대쪽으로 향했다. 이제 볼일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어제일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목적지도 없이 정처없이 헤매었다. 괜히 100엔숍에 들어가기도 하고, 출출해 닭꼬치를 사먹기도 했다. 그러다 게임센터에 눈길이라도 가면 지난 추억이 떠올라 괜히 서글퍼지기만 했다. 나도 참 징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어째 방도를 찾으려 어둠 속을 더듬거릴 수록 앞으로 나아가긴 커녕 생채기만 느는 것 같다. 지친다. 정말.


"이 키홀더 귀엽다~"


꺄꺄거리는 여학생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가게들 뿐이다. 이런 데가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여기까지 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색색깔의 화장품점과 팬시점의 모습에 눈이 빙글 돈다.


"안녕하세요~"


"앗, 네, 넷?!"


"지금 오픈 기념 이벤트 진행 중이예요."


"저, 저기 저는..."


"한 번 구경이라도 하고 가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전단지를 내미는 직원의 페이스에 밀려 가게에 들어와버렸다. 뭔가 좋은 향기가 난다. 평생 연이라곤 없을 줄 알았던 가게에 발을 들이니 당황스러운 점이 한 두개가 아니다. 주변은 핑크색 만발이고 무엇보다 여, 여자애들이 잔뜩...!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여기선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거지? 그냥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어라 나 지금까지 어떻게 움직였더라? 도와줘, 토도마츠! 너 이런 데 익숙하잖아! 이렇게까지 토도마츠가 보고 싶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치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나 혼자다. 예의상 얼른 한 바퀴만 돌고 돌아가잔 심정으로 머뭇거리며 걸었다. 아기자기한 제품들이 반듯하게 진열된 채 자신을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다. 대충 훑어보던 차에 한 광고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랑하는 마음을 남몰래 그대에게」


각양각색의 편지지와 편지봉투가 진열대에 가지란히 꽂혀있었다. 나는 홀린듯 진열대로 가서 편지세트를 집었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죄라도 지은 듯 손이 떨린다.


"마음을... 남몰래..."


밀어서 안되면 당겨라.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 * *


"네? 앞으로 방과후는 쵸로마츠 선배가 다 맡겠다고요?"


"응. 안될까?"


"안될 거야 없지만..."


말끝을 흐린 후배는 꽤나 떨떠름해보였다. 하긴 졸업 앞둔 3학년이 자발적으로 방과후에 도서관에 남겠다고 하는 거니까. 실제로 나를 제외한 3학년 부원들은 이미 탈퇴한 상태나 마찬가지다. 이녀석이 날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이제 곧 졸업이라 학교에 있을 시간도 별로 없잖아. 그래서 그래. 안될까?"


"선배가 그렇다면야 뭐... 알겠어요. 다른 부원들에게는 제가 말해놓을게요."


"그래. 고마워."


여전히 찝찝하단 반응이었지만 후배는 순순히 수락했다. 그야 방과후 담당은 다들 기피하니까. 우리 학교 도서관은 거짓말로도 시설이 좋지 않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 도서관보다는 가까운 시립 도서관을 이용하곤 한다. 그렇게 텅텅 빈 도서관이여도 일단은 도서관. 혹시 모를 이용자를 위해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 일도 최근 사서 선생님께서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셔서 오로지 도서부의 일이 되버렸다. 안그래도 부원이 적은 탓에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 두번은 방과후를 맡아야할 판이었는데 그걸 웬 선배가 전부 맡는다니 후배들 입장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교실로 돌아가는 후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방금 나 어떻게 보였을까. 이상한 괴짜 선배로 보였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곧 졸업이고, 형제를 좋아하는 사람보단 이상한 괴짜 선배가 더 양반이다. 나는 가방을 고쳐매고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 * *


결국은 질렀다. 저질러버렸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연두색 편지세트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요즘 시대에 러브레터라니. 시대착오적인 느낌은 없지 않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내게 남음 방법은 이 수밖에 없으니까.

밀어서 안되면 당겨라. 지금까지 미는 것은 질리도록 해왔다. 거리를 벌리고 심한 말을 하고 무시까지 해봤다. 그 결과 장렬히 실패했다. 이제 남은 건 당기는 것뿐. 그래, 고백뿐인 것이다. 동성에 형제란 이유로 생각지도 못한 방법. 그렇지만 편지라면, 익명이라면 가능하다. 지금까지 억누르기만 해 역으로 넘쳐났던 마음을 차라리 비운다면... 이번에야말로 이 마음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고 펜을 쥐었다. 펜촉을 갖다대자 편지지가 갑자기 광활하게 보인다. 지금부터 여기에 내 마음을 담는 것이다. 손에서 땀이 나는 것만 같다. 나는 펜을 고쳐쥐고 서두를 떼었다.


「오소마츠군에게」


편지 속의 나는 여학생의 탈을 쓰고서 오소마츠형을 '오소마츠군'이라 부르고,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쓴다. 편지 속에서만큼은 동성도 형제도 아닌 이성의 그저 같은 학교 학생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숨통이 트여 천천히 숨을 들이마쉬었다. 편지 내용을 다시 머리 속에서 정리한 뒤 나는 천천히 펜을 놀렸다. 마음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흘러나오는 연심을 이 펜 잉크에 담아 편지에 붓는다. 천천히, 조금씩, 신중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내려갔다. 마지막 한 줄을 남기고 손을 가볍게 풀었다. 다시 쥔 펜은 잠시 편지지 위를 방황하다 이내 힘을 주어 내 진심을 새긴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드디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고개를 꺾어 위를 보았다. 3년. 이 한 마디때문에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것도 비록 익명을 빌린 형태지만 그래도─


"후련하다."


나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평생 전하지도 못할 줄 알았다. 평생 묻어두자고 맹세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 나도 오소마츠형도 상처받고 말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래야했던 걸지도 모른다. 미적미적 시간만 끌지 말고 진작에 나만이 상처받는 식으로 진작에 끝을 냈어야했다.


"지금도 상처 받기 싫어서 꼼수 쓰고 있지만..."


이름 없는 편지를 손으로 쓸었다. 나는 정말 비겁하고 약한 놈이다. 마지막으로 내일 날짜를 기입하고 편지봉투에 넣었다. 내일이면 졸업식까지 딱 한 달이다. 이 한 달이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유예기간이다. 나는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맞춰 6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공백 미포함 8,809자



러브레터를 쓰기까지의 쵸로마츠 이야기입니다! 쵸로마츠가 막 힘들어하다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걸 쓰고 싶었는데 음...

참고로 이 시리즈(?)는 5편으로 끝낼 예정입니다. 앞으로 두 편만 더...! 힘내야지!

음 더 할 말이 없다. 이번 편도 봐주셔서 감사하고, 날씨 추운데 몸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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