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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마츠 side
학생들을 제치고 복도를 달려 교실문을 열어제꼈다. 교실에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반애들 사이로 드문드문 빈자리들이 눈에 띄었다. 큰 소리때문인지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턱까지 올라온 숨을 가다듬었다. 새하얀 입김이 날아올랐다가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반복했다. 어째 오늘따라 교실이 더 싸늘한 것 같다. 곧장 내 자리로 걸어가 가방은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책상 속에 손을 넣었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없기를. 내가 안늦었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몇초 안있어 손가락 끝에 뭔가가 닿았다. 꺼내보니 이번에도 연두색 편지봉투다.
"아아악! 이게 역대급으로 일찍 온 거였는데!!!"
이것도 다른 녀석들이 깨워줘서 겨우 온건데... 이 이상 일찍 오는 건 무리이... 책상 위에 그대로 엎어지니 책상이 차가워서 얼굴이 다 시렵다. 시려워서 더 서럽다. 나는 책상에 얼굴이 마구 부비적거렸다. 그렇담 얘는 대체 몇시에 학교 오는 거야... 축 처져있는 나를 놀리듯 편지봉투는 반듯하기만 했다. 엎드린 채로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오늘도 어김없이 똑같은 편지지에 똑같은 글씨체로 이렇게 써있었다.
「오소마츠군에게
안녕하세요, 오소마츠군.」
나는 너때문에 안녕하지 않은데 어쩌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도 일상을 빙자한 사랑고백 내용으로 여전히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 나는 날짜 아래 공백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체불명의 러브레터가 오기 시작한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
"있지, 이거 어떻게 생각해, 토도마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야 너 여자친구 있었으니깐~"
"그 여자친구 어제 댁들때문에 깨졌거든요!"
"아잉~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말궁~"
"쩨, 쩨쩨~?!"
토도마츠는 눈을 부라리며 악을 썼다. 하여간 이럴 때보면 귀엽지 않은 녀석이다. 치사하게 혼자 먼저 앞서나가는 동생을 친절히 형으로서 조금, 진짜 쪼끔 제재를 해준 것 뿐인데. 솔직히 그정도로 깨질 정도라면 할 말 없는 거 아닌감? 육둥이 얕보지마. 그리고 연애(라고 하기엔 애매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형의 상담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잖. 토도마츠의 어마무시한 시선을 흘러보내며 밥과 카라아게를 입에 넣었다. 튀김옷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촉촉한 닭고기와 어울려 짭짤한 맛을 냈다. 입을 댓발 내밀던 토도마츠도 나를 따라 카라아게를 물더니 표정이 스르륵 풀린다. 역시 엄마 대단하다니까.
"그래서? 그 러브레터가 뭐 어쨌는데."
"그-러-니-까-! 매일 매일 편지가 오는데 글쎄 편지에 이름이 없다니까! 이름이! 단 한 번도!"
"이름이 없을 수도 있지. 까먹었다던가."
"그럴 리 없어! 너도 첫 편지는 봤잖아? 이 아이 성격도 그렇고 몇시간 공들여쓴 것 같고, 그런 실수를 저지를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구."
"사람은 누구나 실수해, 오소마츠형"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이름 안적는 실수를 한다고?!"
"그 애 엄청 덜렁이인가 보네- 와- 귀엽네- 자, 상담 끝-"
"아아아~ 그러지말고오, 토도마츠으~"
앙탈을 쓰며 팔에 매달리자 토도마츠의 표정이 구겨졌다. 굳이 우리들이 방해, 아니 제재하지 않았어도 여자친구가 이 표정만 보면 바로 헤어질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떨-어-져-!"
토도마츠가 무자비하게 팔을 흔드는 통에 더욱 세게 팔에 매달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진짜 물러날 생각이 없다. 토도마츠말고는 갈 곳이 없으니까! 나르시스트나 체리마츠, 네코마츠, 쥬시마츠한테 이런 상담을 하면 개그밖에 안된다고! 내 곧은 의지를 보기라도 한 것인지 토도마츠는 한숨을 푹 내쉬고 양 손을 올렸다. 항복선언이다. 진작에 이랬으면 좀 좋아. 나는 킬킬 웃었다.
"그러니까 오소마츠형은 그 아이가 왜 이름을 안쓴 건가 궁금한 거야?"
"그것도 있고, 누군지 궁금한 것도 있고."
"실수가 아니라면... 그거네. 자신을 밝히고 싶지 않은 거네."
"엥? 왜?"
그저 눈을 깜박이니 왜 묻느냔 눈빛이 돌아왔다. 아니 그치만 진짜 모르겠는걸. 대체 왜 감추는 건데? 토도마츠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야~ 뭐어... 숨길 만한 여러 사정이 있겠지."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이미 남친이 있다던가?"
"와, 나 임자 있는 애도 반하게 해버린 거? 역시 카리스마 레전드."
"아아아 취소, 취소!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
"에에~? 그럼 뭔데?"
"으음..."
나를 노려보던 토도마츠는 이내 턱을 괴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토도마츠는 눈치 빠르고 얍삽한 녀석이다. 내가 귀찮아서라도 진지하게 생각해주겠지. 이유야 어찌됐든 진지하게 생각해준다면 나야 좋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썬 알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날 좋아하면서 왜 이름을 안밝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나였으면 이름을 밝히다못해 이미 오래전에 찾아갔을 것이다. 아니, 아예 이런 짓 하지도 않지. 이 편지들 장난이라기엔 진지하고, 진짜라한다면 너무 답답하다. 누군지는 둘째치더라도 이러는 이유부터 좀 알아야겠다. 토도마츠는 내가 쥐고 있는 편지를 흘겨본 후 젓가락으로 도시락통을 몇번치고선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아이, 마음 정리할 셈인 거 아냐?"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까 미처 삼켜지지 못한 밥알이 입 안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왜? 진짜로 왜? 이거 고백이잖? 고백했으면 서로 만나서 마음 맞으면 사귀는 거 아니야?"
"모든 고백이 다 그렇게 단순하고 로맨틱한 건 아니야, 오소마츠형. 나한테 보여줬던 첫 편지를 잘 떠올려봐. 무려 3년을 짝사랑한 끝에 쓴 첫 러브레터인데 장황한 서문 끝에 꼴랑 한 문장의 결론이잖아. 그리고 지금 오고 있는 편지도 거의 일상글이라며?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는 말 하는 걸 힘들어하는 거라고. 이유야 모르겠지만 오소마츠형을 좋아하는 게 힘드니까 그만두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편지 계속 오는데..."
"미련이 남은 거겠지. 오소마츠형이 계속 눈에 밟히니까 편지가 계속 오는 거야. 사귈 마음 있었으면 이름은 진작에 써놨을텐데 전혀 없잖아? 거기다 지금 시기도 서로 졸업 앞둔 시기고. 마음 정리하기엔 딱이지."
"와... 역시 여러번 차인 사람답─"
"그 이상 말하면 진짜 가만안둔다!"
토도마츠가 신경질적으로 도시락통을 정리했다. 짜증이 제대로 났는지 토도마츠의 손이 번번히 미끄러진다. 평소라면 놀렸겠지만 정신이 멍해서 무언갈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음을 정리한다고? 왜? 누구 맘대로? 어찌저찌 매듭을 짓고 토도마츠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땐 점심시간이 10분 남짓 남은 시각이었다.
"아무튼! 그 애가 마음 정리하려고 그러는 것 같으니까 오소마츠형은 괜한 짓 할 생각말고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왜! 나 얘 진짜 만나보고 싶은데!"
"그 애도 다 사정이 있을 테니까! 형 말대로 편지 봐봐. 괜히 헛튼 짓 할 애로 보여?"
"그건..."
"알았으면 그놈의 '왜' 소리 그만해. 나 갈게. 양치해야해."
"아, 토도마츠 잠깐만! 하나만 더!"
막 발을 떼려는 토도마츠를 붙잡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내쪽에서도 미련이 남는다.
"너 얘가 우리랑 동급생인 건 어떻게 알았어?"
"오소마츠형이 보여준 첫 편지에 입학하고 형 봤는데 벌써 3학년 겨울이라니 어쩌구 써있었잖아."
이제 됐지? 미련없이 돌아서는 토도마츠의 등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실마리를 찾았다. 이어나갈 수 있다. 이렇게 끝내는 건 내가 용납 못한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게. 나는 손에 들린 편지지를 꼬옥 쥐었다.
*
종이 치기 무섭게 교실에서 뛰어나와 냅다 집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는 연극부, 쵸로마츠는 도서관, 이치마츠는 또 고양이랑 놀다 올테고, 쥬시마츠는 야구, 토도마츠는 아까 친구들이랑 실연의 아픔을 달래러간다고 했다. 즉, 당분간 집에 아무도 없다는 소리! 나 혼자 있을 대찬스! 아차차. 흥분한 나머지 집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백스텝으로 다시 돌아와 열쇠로 문을 따고 계단을 두칸씩 밟고 올라갔다. 오래된 계단이 삐걱삐걱 울어댔다.
방문을 열고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쪽은 온통 풀밭이다. 연두색 편지봉투들의 향연인 것이다. 혹시나 구겨질새라 조심하며 하나씩 꺼내펼쳤다. 바닥에 6장의 편지가 가지런히 놓여지니 글자들이 어지러이 내 눈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휘저어 정신을 차리고서 평생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노트와 펜을 꺼냈다.
편지의 내용은 맨 첫번째를 제외하면 온통 일상 이야기. 잘보면 토도마츠가 3학년이었단 걸 알았듯이 편지에 뭔가 다른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 편지를 찬찬히 읽어가며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샅샅이 찾았다. 멀리서 이런 노력으로 공부나 하라는 쵸로마츠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형아는 알아먹지도 못할 공부보다 이쪽이 더 중요해요~ 거의 일상 이야기다보니 단서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늘 체육시간에 다른 반과 축구를 했어요. 그러다 문득 오소마츠군이 체육대회에서 축구 종목에 참가했던 게 떠올랐어요. 그때 운동장을 누비는 오소마츠군의 모습 정말 멋있었는데... 다른 팀이라 티는 내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응원하고 있었답니다.」
「수업시간에 우연히 운동장을 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오소마츠군이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었거든요. 단순히 어제 저희반과 똑같은 수업을 받은 것이겠지만 그런 편지를 쓴 다음날 오소마츠군이 축구하는 걸 보게 되서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그만 수업시간인 것도 잊고 한참을 보고 말았답니다.」
「오소마츠군은 책 좋아하나요? 책얘기에 얼굴 구겨지는 게 눈에 선하네요. 저도 알고 있어요. 오소마츠군이 책이라면 진저리를 친다는 거. 그래도 한 번쯤은 오소마츠군에게 제가 좋아하는 책을 소개해주고 싶어요. 방과후의 조용한 도서관을 누비다보면 오소마츠군이라도 좋아할 것 같은 책을 발견하기도 하거든요. 오늘도─」
다시 읽어도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가버린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는 어쩜 이리 귀여운 걸까. 토도마츠는 이 편지들에 대해 스토커같다느니 말했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이 아이는 내 뒤를 밟지도 도촬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아이의 일상에 그저 내가 녹아있을 뿐이다. 우연히 내가 보이기라도 하면 시선이 저절로 따라가고, 무언갈 보면 내가 생각나는 그런... 갑자기 부끄러워져 몸을 배배 꼬았다. 아, 역시 만나고 싶다. 이 아이가 보고 싶다. 솔직히 이런 글만으로 반했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아이를 실제로 보면 그순간 사랑에 빠지게 될 것만 같다. 그래서 이 내가 시시한 책들도 읽게 된다거나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응? 잠깐만. 이 시기에 방과후까지 도서관가는 애는 없을텐데? 아, 도서부원인가? 오, 역시 난 천재?"
역시 내 생각대로다. 편지 속에 그 아이에 대한 단서가 있다! 신이 나서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수업시간에 운동장을 봤다는 건 아마도 창가자리. 그리고 체육시간 이야기가 나온 게 월요일이랑 목요일이니까... 나는 편지를 내려놓고 책상에 나란히 붙여진 시간표를 훑어봤다. 이럴 땐 육둥이인 게 참 편하다. 모든 반의 시간표가 붙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눈에 여러 반 시간표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네 반 중에 있으면 좋고, 아니여도 힘들게 발품 팔지 않아도 후보를 대충 추릴 수 있다.
"오, 있다 있다. 4반인가~ 쵸로마츠랑 이치마츠랑 같은 반이네. 그럼 걔네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4반에 창가자리에 도서부원인..."
어라? 왠지 친숙한데? 순간 머릿 속에 떠오른 한 이미지에 어안이 다 벙벙해진다. 나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설마..."
아닐거란 생각과 달리 흐렸던 이미지가 점점 더 선명해져온다. 4반에 창가자리에 도서부원. 내가 아는 한 이런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이 편지는 마음정리라고 하던, 모든 고백이 로맨틱한 것이 아니라던 토도마츠의 말이 귀에서 웅웅 울려댄다. 이미지와 목소리가 탁하게 뒤섞여간다.
"다녀왔습니다. 응? 오소마츠형뿐이야?"
갑작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목소리는. 계속 함께였으니까 모르고 싶어도 안다. 그녀석이다. 점차 이미지가 뚜렷하게 바뀌어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4반에 창가자리에 도서부원. 그건─
"─쵸로마츠."
내 머리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아이, 쵸로마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오소마츠군에게
안녕하세요, 오소마츠군.」
"으으음..."
어제와 똑같은 편지지, 똑같은 시작을 보고 어제와 달리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냥 사랑스러워보였던 연두색 편지봉투도, 편지지의 반듯한 글씨체도 이젠 쵸로마츠를 연상시키게 한다. 애써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흐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쵸로마츠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그야 어제도 쵸로마츠한테 혼났는걸! 그냥 쵸로마츠랑 공통점이 많은 아이인 거야. 응응. 생각을 떨쳐버리고선 편지에 집중하려 애썼다. 핏발 보일 정도로 눈에 힘을 준 탓에 지끈지끈 아프기만 하다.
"돌겠다..."
결국 편지를 다 읽지도 못하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오늘도 책상은 차갑다. 마음이 들썽거려서 책상에 얼굴이 비볐다가 편지를 보다가 다시 책상에 얼굴을 비비는 것을 반복했다. 나도 안다. 아직은 추측한 것뿐이라는 걸. 이 편지를 쵸로마츠가 쓴 걸 본 것도 아니고, 쵸로마츠한테 편지에 대해 직접 들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추측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확신이 있다. 무려 18년을 함께 산 데다 -지금은 조금 아니지만- 쵸로마츠와 나는 파트너다. 그녀석에 대한 건 부모님보다도 다른 형제들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글씨체나 말투도 당연히. 나는 구겨진 편지를 조심스레 폈다. 보면 볼 수록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그 모든 것이 쵸로마츠다웠다.
"쵸로마츠가 나를...?"
으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추측과 확신과 기분이 엉키고 설키어서 혼잡스럽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앓아야하나.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힘을 풀고 늘어졌다. 몸이 터진 노른자처럼 흘러내리다가 꼬르륵하고 울었다.
"...머리 썼더니 배고파."
아직도 울어대는 배를 살살 문질렀다. 나답지 않게 너무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러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는데. 매점이나 가야겠다. 나는 얇은 지갑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갔다.
*
졸업을 앞둔 3학년쪽 복도는 유독 시끄럽다. 배려인지 격리인지 3학년 교실은 1, 2학년 교실과 떨어져있어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의 경계랄 것 없이 항상 시끌벅적하다. 원래 놀던 학생은 기본이요 공부하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땡땡이치지 않고 교실에 있을 정도로 노니 말 다했지. 나는 유유자적하게 거닐며 야키소바빵을 한입 베어물었다. 역시 점심시간 전에 사먹는 빵이 최고다. 덕분에 지갑이 텅 비었지만 다른 녀석들한테 빌리면 되니 뭐, 됐나. 기왕 이렇게 나왔으니 좀 더 돌아다니고 싶어졌다. 수업이랄 게 없어서 눈치 못챘는데 교실에만 있으니 좀이 쑤시는 것 같다. 춥지만 오랜만에 옥상이나 갈까. 좋아. 가자.
"응? 쵸로마츠?"
왼쪽으로 꺾자마자 익숙한 뒷통수에 나도 모르게 복도 벽에 바짝 붙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왜 하필이면 지금 보냐. 겨우 맑아졌던 머리 속이 다시 탁해지는 것 같다. 곧장 교실로 가지 않은 벌을 받는 건가. 아니, 아니. 지금까지 땡땡이 잘만 쳤는뎁쇼!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좀 억울해져서 고개만 살짝 내밀고 녀석의 둥그런 뒷통수를 노려봤다. 쵸로마츠는 따갑지도 않은건지 잘만 대화하고 있다. 하여간 둔하다.
"그나저나 같이 있는 여자애는 누구지?"
작은 키에 마른 체형, 갈색 단발머리. 쵸로마츠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제법 반반한 듯하다. 헤에, 약간 내 스타일려나. 슬쩍 쵸로마츠를 보니 쵸로마츠도 싫지 않은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나는 처음 보는 표정이다. 두 눈을 깜박이며 한창 얘기 중인 두 남녀를 보았다.
"...분위기 좋네."
뭐야. 역시 쵸로마츠가 아닌가. 혼자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편지 쓴 아이와 아무리 공통점이 있어도 그렇지 좀 터무니 없는 생각이긴 했다. 저 자칭 상식인이 형제인 나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저녀석 여자 좋아하고...
다행이다. 아니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벽에 기대어섰다.
그건 그렇고 여자애랑 저렇게 가까워지다니 괘씸하다. 고민하고 있던 게 싹 싸라지고 나니 현실이 급습한다. 얼마 전에 같이 토도마츠 방해하면서 커플들 똥코털 다 태워버린다 뭐다 말했던 놈은 어딜 간 거냐, 쵸로마츠! 대화가 끝났는지 고개를 숙인 후 사라지는 여학생을 보며 쵸로마츠는 살살 손을 흔들었다. 어디로 보나 상냥하고 좋은 선배 모습이다. 내가 어제오늘 골머리 앓고 있던 사이 그 원인은 여자와 꽁냥거렸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려죽겠다. 나는 인상을 쓰며 성큼성큼 쵸로마츠에게 걸어가 어깨를 붙잡았다.
"어이, 쵸로마츠!"
"흐러아으카앗?!"
"이상한 소리."
"오, 오소마츠형?!"
쵸로마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게서 두세발작 떨어졌다. 상상 이상의 반응에 도리어 이쪽이 놀라버렸다.
"너 너무 놀라는 거 아니냐."
"흐, 아, 에?! 어, 언제부터 있었어?!"
"언제부터냐니 그야~ 쵸로마츠군이 귀여운 후배쨩이랑 대화하고 있었을 때부터~?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으응?"
"걔, 걔는... 그냥 도서부 후배야. 내가 방과후 맡는다는 거 전달이 잘 안되었던 건지 확인하러 온 거 뿐이라고."
"뭐야. 그런 거였어? 역시 동정마츠."
"거기서 동정이 왜 나와! 그리고 너도 동정이잖아!!!"
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 웃어버리니 쵸로마츠가 또 한 소리를 내질렀다. 이래야 쵸로마츠지. 내가 아는 쵸로마츠를 보니 아까 고민하고 있던 게 전부 바보같아졌다. 기분이 좋아진데다 할 일도 없어 남아있던 야키소바빵을 한 입에 쑤셔넣고 쵸로마츠 뒤를 졸졸 따라갔다. 힐끗 보긴 해도 수업시간이 아니여서인지 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형제에겐 무른 녀석이다.
"아아~ 여자친구 갖고 싶다~ 새해 참배 때 거금들여 애인 생기게 해달라 소원빌었는데 왜 안이뤄지지? 형아 옆구리 시려워서 죽을 것 같아~"
말을 마친 후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그러게..."
......
응? 그것뿐? 5엔이 무슨 거금이냐는 날카로운 츳코미가 날아올 줄 알았는데? 따져묻듯이 쵸로마츠를 보면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멍하니 걸어가고 있었다. 이건 또 처음보는 표정이다. 쵸로마츠를 살피는 사이 뭐라 말을 덧붙일 타이밍을 놓쳐버려 입만 뻥긋거렸다. 당황스러워 식은 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여태까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다. 탁구처럼 내가 무언갈 말하면 쵸로마츠가 늘 받아쳐줬다. 학교에 대해서든 가족에 대해서든 그 어떤 이야기도 쵸로마츠는─
─잠깐만. 그러고보니 쵸로마츠랑 여자 얘기한 게 얼마만이지?
"얼른 여자친구 생겼으면 좋겠네."
과거를 막 헤집으려는 찰나에 날아든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정리했다. 말에 주어다 없다. 대체 누구한테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질문을 하는 대신 나는 쵸로마츠를 보았고, 쵸로마츠도 나를 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쵸로마츠는 눈썹을 떨구고 입꼬리를 올렸다. 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표정만큼은 처음이 아니다. 이건 중학교 졸업식 때 텅 빈 교실에서 봤던, 그때 그 인의적인 미소다.
쵸로마츠, 너구나.
왜 몰랐을까. 왜 지금까지 눈치 못챘을까. 이녀석은 이렇게도 거짓말이 서툰 녀석인데. 미세하게 떨고 있는 눈썹과 입꼬리가 안타까웠다. 쵸로마츠는 이렇게 중학교 졸업식 때부터 내내 나를 좋아한다고 소리없이 외치고 있던 것일까. 나오지 못한 소리가 자신을 찔러대도 참았을 것이다. 그 이유야 뻔하다. 동성에 형제이니까. 그리고 계속 나와 '파트너'로 있고 싶으니까.
머리 위에서 종소리가 명쾌하게 울리고 쵸로마츠는 이만 가봐야겠다며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쵸로마츠의 반듯한 등이 멀어져가는 것을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보았다. 그러고보니 나는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내내 저 등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일부러 나와 거리를 둔다는 것정도는 처음부터 눈치챘고, 당연히 섭섭하고 외로웠지만 돌아오라며 무리부리진 않았다. 그야 나는 쵸로마츠의 파트너니까. 파트너로서 파트너의 선택은 존중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그 선택의 이유가 이런 것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이번에도 가만히 있어줘야지 어쩌겠는가.
"나 형이니까."
끙끙 앓다 이제 겨우 마음 정리하려는 그녀석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모른 척 입 다물고 기다릴 것이다. 쵸로마츠가 알아서 돌아올 때까지. 정신을 가다듬고 뒤돌아 교실로 향했다. 아까 분명 야키소바빵을 먹었을 터인데 입맛이 쓰다.
*
「오소마츠군에게」
오늘도 정갈한 글씨체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편지가 오기 시작한지도 벌써 3주째로 접어들었다. 편지는 한결같고, 쵸로마츠도 평소와 다름없다. 기분탓인지 조금 후련해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달라진 것은 나뿐이다. 가만히 쵸로마츠를 기다리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리 쉽게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편지 속의 쵸로마츠, 눈 앞의 쵸로마츠. 날 좋아하는 쵸로마츠, 내 동생인 쵸로마츠. 이 두 개의 진실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만다. 편지를 읽고 쵸로마츠를 보기라도 하면 온갖 말들이 내 안에서 요동쳐 속이 울렁거린다.
너도 이렇게 힘들었던 거야?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너는 이걸로 괜찮아?
—나는 정말 이대로 있어도 돼?
하루에도 몇번씩 토해내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나는 웃는다.
*
운명이라는 건 진짜 있는 걸까. 신이니 운명이니 원래부터 믿지도 않았고, 내가 무슨 카라마츠도 아니지만 우연히 보게 된 잡지에서 우연히 본 내 운세가 우연히 절묘한 타이밍에 맞아떨어지니 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까 본 내 운세를 곱씹었다.
「오늘 당신에겐 껄끄러운 사건이 있겠네요. 무려 당신의 운명을 뒤흔들 정도! 당황하지 마시고 자기자신을 조용히 들여다보세요. 그 끝에 다다른 결론이 당신을 해피엔딩으로 이끌 겁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껄끄러운 사건 하나는 잘 알겠다. 나는 고개만 살짝 내밀어 건물 뒤편에 있는 두 남녀를 보았다. 쵸로마츠랑 저번에 본 그 여자애다. 그냥 좀 돌아다닌 것뿐인데 왜 이런 일이! 보자마자 건물 벽에 바짝 붙고 말았다. 이거 그거인가? 데자뷰? 아니면 징크스? 안그래도 저번에 악의는 없었지만 여친이니 뭐니로 쵸로마츠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안그래도 신경쓰이던 참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딱 보게 되다니. 그냥 모른 척 지나가고 싶지만 교실로 지나가려면 여길 지나야한다. 아니면 엄청 돌아가야하는데... 나는 고민하다 머리를 헤집었다. 그냥 돌아가자. 여기서 찔려하는 건 나뿐이니까.
"쵸로마츠 선배! 그, 저... 조, 좋아해요!"
타져나오는 목소리에 다리가 멈췄다. 나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내밀어 그 둘을 보았다. 여자애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간절한 눈빛으로 쵸로마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이, 진심이다. 저번엔 쵸로마츠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동글동글한 게 꽤 귀엽게 생겼다. 도서부원이고, 쵸로마츠가 좋은 애라고 했으니 착실하고 착한 아이겠지.
저 아이, 안됐네. 쵸로마츠는 날 좋아하는데.
졸업식까지 앞으로 일주일. 참고 참다 겨우 토해낸 고백일 터인데 결말이 뻔히 보인다. 사랑하는 소녀는 사랑스럽다. 그렇기에 더욱 안타깝다. 나는 벽에 기대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쵸로마츠 녀석 마음 여린데 잘 거절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아니, 거절 안할 수도 있는 거잖아.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두 눈이 번뜩 뜨였다. 그래, 쵸로마츠는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받아들일 것이다. 나에 대한 마음은 정리하고 있으니까. 그보다 아직 날 좋아하긴 하는 걸까?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편지를 계속 쓰는 것도 그냥 졸업식까지 써야한다는 의무감일 지도 몰라. 설사 아직 마음이 남아있을 지라도 그 마음을 완전히 끝내려고 사귈 수도 있는 거잖아.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쳐 벽에 손을 짚었다. 시야에 들어온 쵸로마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점차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너도 진심으로 대답할 셈이구나. 까드득 손톱이 벽을 긁는다. 쵸로마츠의 시선이 여자아이에게 향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기까지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슬로우모션처럼 흘러간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해.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쵸로마츠의 말로 머리 속에 가득찬 생각들이 단숨에 사그라져간다. 눈을 뜨니 눈썹을 한껏 떨군 쵸로마츠가 보인다. 제대로 거절한 것 맞구나. 벽에 머리를 대고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행이다. 생각들이 빠져나간 빈 공간에 안도감과 행복감이 가득 채워졌다.
─에? 왜?
"그, 그 분이 연인이 아니라면... 저와! 사, 귀어주시면... 안될... 까요...?"
끈질겨. 아까까지만 해도 마냥 귀여워보이던 아이가 갑자기 눈엣가시처럼 거슬린다. 시선을 제대로 못맞추는 것도 배배 손을 꼬는 것도 이젠 그냥 아니꼽다. 나와 달리 쵸로마츠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넘어가지마, 쵸로마츠. 제발 넘어가지 말아줘. 외칠 수 없는 말과 정체 모를 감정이 속에서 꿀렁거린다.
"...미안해.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러는 거 너에게 실례잖아."
"쵸로마츠 선배..."
"그리고 너는 좋은 아이니까 나같은 것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어요... 갑자기 불러내서 이상한 소리나 해서 죄송해요. 그리고 미리 졸업 축하...흑"
여자아이는 말을 채 다 하지도 못하고 뛰어가버렸다. 우는 걸까. 그야 그렇겠지. 차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쵸로마츠 네가 더 상처받은 것 같은 거야? 쵸로마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그 아이의 뒷모습을 쫓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는 머리카락이 힘없이 내려왔다. 가서 뭐라 달래줘야한다고 뇌는 외치고 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쵸로마츠가 저렇게 아파하는 건 아마도... 어쩐지 나도 울 것만 같아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내가 왜이럴까. 그리고 이 가슴의 통증은 대체...
"쵸로마츠."
느리게 발을 떼는 쵸로마츠를 향해 말했다. 쵸로마츠는 듣지 못했는지 멀어져만 간다. 몇 발자국, 몇 초면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속이 울렁거려 움직일 수가 없다. 그동안의 기억과 감정이 깊은 곳에서부터 역류해서 올라온다. 그것들은 문자로 변해 입 안에서 춤을 춘다. 탄산음료를 마신 것처럼 혀가 다 따끔거린다. 나는 그 문자들을 혀로 데굴데굴 굴렸다. 그동안 이해못했던 모든 의문들의 해답이 점차 짜맞추어진다. 내가 그렇게나 편지의 주인을 찾았던 이유, 쵸로마츠인 걸 알고 혼란스러웠던 이유, 가만히 있자고 다짐해놓고 계속 흔들렸던 이유, 그리고 지금 이러는 이유, 그건─
"─쵸로마츠 좋아해."
드디어 뱉어낸 한 마디는 나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공백 미포함 9,994자
아슬아슬하게 올해 안넘겼다!!! 아아아아!!!! 사실 올해 안에 이 시리즈 완결시키는 게 목표였는데... 분량이랑 시간 조절에 실패해버렸어요... 엉엉 오소마츠 이 답답한 녀석ㅠㅠㅠ 너무 뱅뱅 돌잖아ㅠㅠㅠㅠ
그런 고로 마지막편은 내년에!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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