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쵸로마츠가 죽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인간에게. 뒤늦게 얘기를 듣고 달려가보니 쵸로마츠는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쓰러져있었다. 내가 아는 쵸로마츠는 강하며 아름답고 피를 묻히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내가 본 쵸로마츠는─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괴성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내 안의 뭔가가 무너져내렸다. 결코 굽힌 적 없던 무릎을 꿇고 피웅덩이를 헤짚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무리 네 이름을 외쳐도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오소마츠형.」
그 한 마디가 없어졌다는 것이 이렇게도 나를 망가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처리해."
"보스..."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 안 들려?!"
책상을 내리치자 찻잔이 흔들리다 떨어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맛없는 차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퍼져나갔다. 부하녀석은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꿋꿋하게 서있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가 보네. 알면서도 일어나기 싫은 건 날 보채는 네 목소리가 없기에. 지금 당장이라도 보스가 뭐하는 짓이냐며 호통이 날아올 것 같은데 집무실은 눈동자 굴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네가 죽었는데도 패밀리는 돌아간다. 그 당연한 사실이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네가 죽은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네가 죽은 전투로 패밀리의 위상이 높아졌다. 네가 죽은 이후로 나는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나와 너를 두고 돌아가는 세상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을 가리며 의자에 몸을 기대니 의자가 빙글 돌아간다. 마주한 태양빛은 오늘도 눈부시고 뜨거웠다.
「형은 참 태양같은 사람이야.」
보스로 취임하던 날 나에게 작게 건냈던 말이 들려온다. 답지 않은 말을 해서인지 시선을 살짝 피하던 네 모습도 어른거린다. 그때 나에게 태양같은 건 오히려 너라고 말했어야 했을까. 그때뿐만이 아니다. 첫 임무 때도, 전투에서 다쳤을 때도, 그 임무 전날에도 그 외에도 잔뜩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이 나를 가득 채운다. 하고 싶은 말은 그때 그때 바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다니 참 웃긴 일이다. 그래도 그 말을 다 들어줄 너는 이제 없다. 나에게 남은 거라곤─
"...차 대기시켜."
─너와 만든 이 패밀리뿐. 힘들어도 괴로워도 이것만큼은 지켜야했다. 너를 지키지 못 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생전의 네가 해둔 일덕분에 협상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내 뒤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더니 죽어서도 그러는 게 참 너답다. 이걸 웃어야할 지, 울어야할 지 몰라 조금 멍하게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도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다가 전부 부질없다는 생각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싱그러운 초록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있었다. 붉은 피 대신 초록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쵸로마츠, 네가 걸어가고 있었다. 두 눈을 의심했다. 깊은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일 거라고. 그렇지만 너는 너무나도 선명했고 생기가 넘쳐보였다. 너는 역시 빨강보다는 초록색이 잘 어울려. 죽음이 아닌 생명의 색.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그러나 한 순간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네 모습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차 세워!"
"예?"
"차 세우라고!"
거친 마찰음 소리가 귀를 찌르고, 멈출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차에서 뛰어내렸다.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너에게로 달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동안 했던 후회가 나가떨어진다. 한 번만 더 너를 만난다면 죽음만이 가득한 전장으로 내몰지 않을 거야. 한 번만 더 네가 나를 부른다면 나는 웃으면서 답해줄 거야. 한 번만 더 너와 함께한다면 사랑하고 아끼며 평생을 지켜줄 거야. 모든 후회가 사라진 머리가 푸른 하늘처럼 깨끗하게 개었다. 네가 사라진 거리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쉬었다.
"아까 걔에 대해서 조사하고 와."
이제 다시는 후회하지 않아.
"오소마츠."
"응? 왜 그래, 쵸로쨩?"
"나 이 라노벨 전권 갖고 싶어. 그리고 출출하니까 디저트도."
"응, 알겠어~ 애들한테 말해놓을게."
"고마워."
쵸로쨩은 싱긋 웃고는 총총거리면서 걸어갔다. 응, 오늘도 귀여워. 그런데 어째 요새 쵸로쨩이 뻔뻔해진 것 같다. 왜일까. 분명 처음에만 해도 내 눈도 못 마주치고 쩔쩔 맸던 것 같은데. 리무진 안에서 처음 대면한 쵸로마츠는 당혹감과 공포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언뜻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정말로 죽은 쵸로마츠와 많이 닮아있었다. 축 처진 눈썹, 작은 눈동자, 꾹 다물린 ㅅ자 입, 단정한 몸가짐까지 이렇게나 똑같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막상 쵸로마츠를 보면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쵸로마츠 네가 아직 나에게는 죽은 사람이 아니여서 그럴까. 아니면 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럴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쵸로쨩과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참 웃기지? 닮아서 데려왔는데 데려오니 다른 점들만 보인다는 게. 처음 만날 때부터 나도 모르게 쵸로쨩이라고 부른 건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쵸로마츠와의 차이를 알고 구분지은 걸지도 모르겠다. 쵸로마츠는 좀 더 무뚝뚝했다. 공사의 구분이 철저해서 일을 할 때는 날 꼬박꼬박 보스라고 불렀다. 가끔 자기 성질에 이기지 못 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자신이 맡은 일만큼은 철저하게 해결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영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하들 사이에서는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거라는 이야기도 돌았던 모양이지만 가끔씩, 나와 둘만 있을 때 짓던 수줍은 미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에 비해 쵸로쨩은 솔직하다. 제 감정에도, 제 욕심에도. 순간순간의 일에 즉각 반응해서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을 보는 게 제법 재미있다. 그러다보니 숨기는 것이 서투른지 생각이나 감정같은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쵸로쨩을 보고 있으면 아, 나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게 느껴진다. 아마 본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 한 것 같지만. 다섯번째 조건이었던 나를 사랑할 것에 자신 없다고 대답했으면서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 조금 웃기기까지 하다. 날 바라보는 작은 눈동자에 비친 날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 거지? 너에게서 비치는 쵸로마츠? 아니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쵸로쨩? 머리가 복잡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고 멀어지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 그 풍경을 조금 멍하게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아직은 내 의문의 답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한 가지 있다. 나는 쵸로쨩을 쵸로마츠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 둘이 다른 사람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살짝 문을 밀었다. 육중한 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열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헤매이지 않고 곧장 너에게로 향했다. 쵸로쨩. 불편하지도 않은 건지 너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천장을 보며 반듯하게 자고 있었다. 자는 자세까지 참 너답다. 슬쩍 이불 속으로 들어가도 깨지 않는 것까지 알고 보면 허술한 너답기도 하고. 슬며시 웃으며 자고 있는 네 볼을 살살 쓸었다. 쵸로쨩은 조금 움찔거리다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깬건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도 쵸로쨩의 눈꺼풀은 조금도 올라가지 않는다. 어째서인지 그게 조금 아쉬웠다. 너를 껴안으니 비누향이 났다. 그래, 너에게는 이 향이 어울려. 피나 화약같은 죽음의 냄새는 어울리지 않아. 체향과 뒤섞여 묘하게 달콤한듯한 그 향기를 품고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따뜻하다. 닿는 숨결마저도 부드럽다. 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너만 내 곁에 있으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여긴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아도 부서진 건물 잔해 밖에 안 보인다.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 대신 파란 하늘만 있었다. 날씨 참 좋다. 그보다 부하 녀석들은 어디 간 거야. 뒷목을 긁적이고 대충 아무렇게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걷다보면 출구가 나오겠지 싶었다. 이곳에 정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인지 그 어떤 인기척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막한 것이 싫어 근처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찼다. 왼쪽으로 꺾인 돌멩이는 계속해서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내려가는 계단이라도 있나? 돌멩이를 따라 왼쪽으로 꺾어들어갔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나와 똑같은 검은 정장과 구두. 유일하게 다른 초록색 셔츠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굳어있자 날아든 목소리가 내 고개를 들게 했다.
"오랜만이야, 오소마츠형."
"쵸로마츠..."
너는 그날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 서있었다. 아, 이건 꿈이구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인상을 구겼다. 지금 당장 너에게 뛰어가려다 네 손짓에 멈추었다. 계단이 끊겨있다. 내 발걸음에 떨어진 파편들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심연을 내려다보다 다시 너를 보았다. 너무 멀리 있어. 손을 뻗자 쵸로마츠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왜인지는 오소마츠형이 가장 잘 알잖아."
쵸로마츠 목소리는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일할 때처럼 감정을 배제한 바로 그 톤이다. 너는 꿈 속에서조차 냉정하구나. 가슴을 부여잡고 원망스레 바라보자 쵸로마츠는 그저 웃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듯이 덧없는 미소였다. 점점 너와 멀어지는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네가 사라진 그 날부터 계속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 속에 채워놨었다. 널 다시 만난다면...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없었다. 머릿 속이 새하얗다. 하고 싶던 말들이 전부 어디로 간 거지? 헛헛한 가슴을 쥐어뜯어도 나오는 말이라곤 없었다. 왜지? 왜야? 나는 너를─
"오소마츠."
갑자기 날아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쵸로마츠가, 아니 쵸로쨩이 계단 위에 서있었다. 날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고요해보이면서도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고 쵸로쨩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널 좋아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쵸로쨩은 날 잠시간 바라보다가 건물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기다려. 널 쫓아 달려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탁한 초록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소마츠형, 어디 가는 거야.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 있던 거 아니였어?"
네가 내 눈 앞에 있다. 아까와 달리 떨어져있지도 않고 손도 잡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머릿 속엔 쵸로쨩 생각만 가득한 걸까. 빨리 쵸로쨩에게 가야한다고 안달복달하고 있는 걸까. 날 좋아한다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댄다. 아, 그렇구나. 나는 이미... 차분하게 너와 시선을 맞추자 쵸로마츠는 어서 말하라는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새하얗던 머릿 속에 차츰차츰 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단순하게, 그러나 뚜렷하게 나타난 그 말은 이것만큼은 꿈에서라도 평생 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쵸로마츠에게 잡힌 손을 강하게 마주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강하게 뱉었다.
"...사랑했어."
"응, 나도."
"잘 가, 쵸로마츠."
쵸로마츠는 웃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하게.
"그걸로 된 거야, 오소마츠형."
안녕, 잘 지내. 손을 흔드는 쵸로마츠를 뒤로 하고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천장 없는 푸른 하늘 속에 홀로 있는 너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뭐야, 뭐야? 그거 데이트 신청이야?"
"하아..."
"왜 그래?"
"정말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라서."
좋은 거야, 싫은 거야. 애매한 표정인 쵸로쨩을 껴안자 쵸로쨩은 또 한숨을 내쉬면서도 날 밀어내지는 않았다. 응, 싫은 건 아니네. 헤실헤실 웃으며 네 어깨에 뺨을 부비적거렸다.
"그런데 웬일이야? 네가 먼저 같이 나가자고 하고."
"맨날 감시 붙는 것도 지겨워서. 너랑 나가면 감시 안 붙을 거 아니야."
"정말 그거뿐이야? 사실은 나랑 러브러브하고 싶었다든가~"
"너 정말 언제 죽냐."
매정한 말과 날 밀어내는 손길에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쩔 수 없잖아. 마음을 다 잡은 날에 사랑하는 상대에게서의 데이트 요청이라니. 손에 입을 맞추고 미소 짓자 쵸로쨩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응. 오늘도 귀엽다. 이제부터는 정말 몸도, 마음도 상처 하나 받지 않도록 지켜줄 거다. 내가 사랑하는 건 이 부끄럼쟁이니까.
"그래서 어디 가고 싶은데? 어디든지 데려가줄게."
"어디든지라... 하와이라든가?"
"여보세요? 비행기 대기시켜놔. 하와이 갈 거야."
"아냐, 아냐, 아냐! 농담이야!"
하와이는 됐다고 난리를 치더니 쵸로쨩이 데려온 곳은 놀이동산이었다. 그것도 해외가 아니라 일본 국내 어느 작은 놀이동산. 하다못해 더 큰 곳으로 가자고, 굳이 국내로 할 거면 통째로 빌릴 수도 있다고 했건만 쵸로쨩은 돈 지랄 말라는 말로 일축했다. 지금까지 내 돈 지랄로 먹고 지낸 게 누구인데. 살짝 어이없었지만 본인이 그러고 싶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평일 한 낮이었고, 성수기도 아니라 그런지 놀이동산은 제법 한산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몇 커플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오늘도 날씨는 좋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도, 정장 대신 입은 빨간 후드도 모든 게 어색했다. 애꿎은 후드를 만지작거리자 쵸로쨩이 답답하다는듯이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툴툴거려도 들떠있긴 한 건지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았다.
처음 와본 놀이동산은 생각보다 더 별로였다. 영상이나 이미지로는 엄청 무서울 것처럼 연출하더니 실제로는 별로... 애초에 하루가 멀다하고 생사의 기로에 서는 내가 이런 애들 장난에 스릴을 느낄리가 없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쵸로쨩 보는 게. 본인이 놀이동산 가자고 했으면서 정작 놀이기구는 잘 타지 못 하는지 탑승 내내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쵸로마츠의 미성이 그렇게 날카롭게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장난스레 '무서우면 손 잡아줄까?'라고 말을 건네도 비명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뭐, 그건 그거대로 색다르고 귀여웠으니 됐지만. 아까 생각에 키득거리며 롤러코스터 타고서 녹초가 된 쵸로쨩을 토닥여주었다. 평소같으면 뭐라 한 소리 날아들텐데 진이 빠졌는지 그저 째려만 보고 있다.
"우리 쵸로쨩~ 많이 힘들어?"
"...너 정말 아무렇지 않아?"
"응. 재밌던데?"
"인간이냐..."
쉬어버린 목소리가 묘하게 섹시하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생각을 마른 침과 함께 삼키고 쵸로쨩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너와 함께 하는 1분 1초가 아쉬웠다. 볼멘 소리를 내면서도 넌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푸르기만 하던 하늘에 붉은 빛이 번져간다 싶더니 이젠 완전히 검푸른 색으로 바뀌어버렸다. 별이 뜨지 않는 하늘 대신 땅에 무수한 빛이 뜨기 시작한다. 특히나 놀이동산의 밤은 화려하다. 빛과 빛 사이로 현란한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며 조금 지루하게 바라보았다. 적막을 깨려는듯이 타고 있는 관람차가 삐그덕거리며 울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널 훔쳐보니 색색깔의 불빛에 마음이 홀린듯 야경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사실은 말이야. 여기 어렸을 때 가족들이랑 왔던 곳이야."
"그래?"
"응.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땐 키가 안 되서 롤러코스터도 못 탔는데."
지금도 못 타긴 하면서. 한 대 맞을까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추억에 잠겨서인지 쵸로마츠는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다. 변해가는 네 표정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형이랑 같이 부모님을 잃어버렸었어. 오늘이랑 달리 사람이 많았거든."
"흐응..."
"내가 겁 먹어서 우니까 높은 곳 가면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 거라면서 둘이서 관람차를 탔었어. 그땐 낮이었는데 밤에 봐도 예쁘네."
쵸로쨩의 눈동자에 빛이 가득하다. 미소를 머금은 옆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쵸로쨩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부시다. 온갖 빛의 향연에 저 속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까 들리는 기분이다. 그래, 이게 네가 봐왔던 세상이구나. 널 따라 웃고 싶었지만 입 안이 써서 고개를 들었다. 별 하나 없이 검기만 한 도시의 하늘이 나를 반겼다. 나의 세계는 이렇게 어둠기만 한데. 다른 건 알고 있었다. 알아도 데려온 거였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그렇지만 너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너를 위해서라면 놓아주는 게 맞는 걸까? 눈을 가늘게 뜨며 숨을 길게 뱉었다. 이제 정상인지 다른 관람차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상의 빛들과도 멀어져 완전히 어둠 속에 빠진듯한 기분이다. 오소마츠.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 즐거웠어?"
빙긋 웃고 있는 쵸로쨩 뒤로 둥근 달이 떠있었다. 현란한 퍼레이드와 비교하면 은은하기 그지없는 빛인데 그 무엇보다도 눈이 부셨다.
"쵸로쨩, 좋아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흘러넘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놓을 수 없다. 이 어두운 나의 세상에 유일한 빛인 너를.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도, 그럼에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 이 욕심조차도 나의 사랑이니까. 진실로 너를 원하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각오가 되어있다. 너를 지켜줄 테니, 그러니... 슬며시 손을 잡자 쵸로쨩은 피식 웃었다. 눈빛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너도 참 매일매일 질리지 않는 구나."
"그야 「너」를 사랑하니까."
쵸로마츠가 아닌 쵸로쨩 널 좋아해. 내 의미가 잘 전해졌을까,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작은 눈동자가 오롯이 날 담은채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놀라서 헤 벌려진 세모입을 꾹 닫아버린 너는 짐짓 시선을 피했다.
"...너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
"그래?"
쵸로쨩은 날 몇번 훔쳐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어두워도 붉어진 귀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그런 작은 점조차도 사랑스럽지만 조급한 마음에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듯이 나를 보는 쵸로쨩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창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있지, 쵸로쨩. 저거 보여? 저기 호텔."
"어? 으응. 저기 큰 거?"
"저기 예약해놨다면 넌 어떡할래? 내가 오늘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기회를 줄게, 쵸로쨩. 나에게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를. 나에게 너는 빛이지만 너에게 나는 아닐테니까. 내가 너를 지킬 수 있는 명분을 줄 수 없다면 떠나가도 좋아. 이 또한 사랑이니까. 쵸로쨩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더니 잡힌 손을 슬쩍 뺐다. 평소엔 처졌던 눈썹을 찡그리며 이리저리 시선을 배회한다. 나는 뭐라 하는 대신 헛헛해진 빈 손을 말아쥐었다.
"너 역시 이상해..."
쵸로쨩은 자신 가슴에 손을 대더니 이내 심장쪽을 움켜잡았다. 나에게 향한 눈빛에는 원망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에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다. 그 태도에 나는 반대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너는.
"네가 이제 와서 이런다고 내가..."
겨우 쥐어짜낸듯한 목소리, 눈가가 붉어진다 싶더니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미소를 머금고 네 옆자리로 가서 앉으니 관란차가 또다시 삐그덕거리며 울었다. 가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고 그대로 너를 내 품에 안았다. 너는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나에게 기대어왔다. 처음 입은 빨간 후드가 촉촉히 젖어가는 게 느껴진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응, 응. 미안해."
사과의 말을 귓가에 속삭이며 등을 연신 토닥였다. 숨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조심스레 쵸로쨩의 볼을 감쌌다. 희미한 눈물자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으니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한다. 원망도, 슬픔도 눈물에 씻겨나갔는지 물방울처럼 영롱하다. 이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이런 나도 너에겐 빛나 보일까. 내 불안을 알고 달래주려는 것처럼 네 손이 내 손 위에 겹쳐진다. 따뜻하다.
"쵸로쨩,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어?"
"사랑해줘...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나를 사랑해줘."
"응. 사랑하고 있어."
애정을 듬뿍 담아 말하니 쵸로마츠의 눈매가 반달처럼 곱게 휘어진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방울이 스며든다.
"나도 사랑해, 오소마츠."
애정 어린 말에 표정이 풀어진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걸까. 고개를 숙이려하니 이마에 온기가 전해져온다. 정말이지. 심장이 쉴 틈은 줘야하는 거 아님?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마를 부볐다. 그 사이 지상으로 내려왔는지 우리의 주위에 빛무리가 가득찼다.
공백 미포함 7,440자
역시 사람은 안 하던 거 하면 안 되나봐요. 지난번 글은 좀 가라앉았는데 제 평소 분위기로 돌아왔네요ㅋㅋㅋ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해피엔딩러버니까... 오소쵸로는 행복해야해~!~! 하... 중간에 막혀서 너무 어려웠어요. 한 명은 죽긴 했지만(...) 두 명의 쵸로마츠 다루는 소설이 처음이기도 했고. 오소마츠... 이 어려운 놈... 마피아하고 니트 조합이라 서로 대비되는 요소들을 넣기도 했는데 그게 전해졌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나마 한가한 오티 주에 이 글을 마무리 지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벌써 9월이네요. 뭘 했다고 9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개강맨이 되었고, 방학 땐 글 잔뜩 써서 좋았는데 이젠 그렇게 못 쓰겠죠...ㅠ 언제 어떤 글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봐요! 제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차 창작 > 오소마츠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소쵸로]아네모네 (0) | 2018.09.29 |
---|---|
[오소쵸로]네 목소리 (1) | 2018.09.08 |
[오소쵸로]수호천사 (0) | 2018.08.23 |
[오소쵸로]킹스메이커 (0) | 2018.08.21 |
[오소쵸로]애인이란 무엇인가요? (0) | 2018.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