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아."
무심코 튀어나간 말이 비에 산산히 부서져간다. 침묵 속을 빗소리가 가득 메운다. 반듯하게 세운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을 끌며 쵸로마츠 옆에 섰다. 눈동자를 굴려 올려다본 옆 얼굴은 턱선이 날카롭게 이어져 깔끔하기 그지 없었다.
"비 오네."
"그러네."
대화답지도 않은 짧은 대화가 끊기고 또 빗소리만이 이 공간을 채운다. 나란히 서서 비 구경인가 싶을 찰나 쵸로마츠가 앞 머리를 쓸어올렸다. 골치가 아플 때면 가끔씩 나오는 악동 시절의 흔적. 단정히 빗어내렸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나는 신기한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머리를 정돈하는 것까지도.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야 세모 모양으로 약간 벌어졌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치마츠, 너 우산 없지?"
"응."
"교실로 가자."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훌쩍 가버리는 뒷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다 천천히 그 발자취를 따라갔다. 요란스러운 빗 소리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마치 스크래치처럼 뒤섞이다 사라졌다.
*
"없잖아?!"
없어. 없어. 없어! 어디에도 없어! 작은 눈동자가 무색할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쵸로마츠는 제 책상 속과 사물함을 마구잡이로 헤짚었다. 저런 모습은 오소마츠형이 쵸로마츠의 CD를 맘대로 가져간 이래로 처음이다. 왜 저러는 지 이유야 알고는 있지만. 이젠 자포자기한 채 주섬주섬 정리를 시작한 쵸로마츠를 뒤로 하고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빗방울을 따라 무수히 그어진 선들이 이어졌다가 또 새 선이 덧씌워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풍경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적당한 자리에 적당히 앉았다. 낡은 의자가 삐그덕하고 울었다.
"...너 거기 누구 자리인지는 알고 앉는 거야?"
"알 게 뭐야."
"내 자리 정도는 알아라."
급히 일어서려하자 쵸로마츠는 손을 저으며 내 앞 자리에 앉았다. 책상 속 정리했던가? 손을 집어넣어보니 삐져나온 종이가 내 손을 찔렀다. 그냥 봐준 거구나. 삐죽삐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종이 가장자리를 접어버렸다.
"이상하다... 분명 예비용 우산 갖다 놨는데 없어졌어."
"그거 아까 오소마츠형이 쓰고 간 것 같던데."
"뭐?! 그럼 말을 했어야지!"
"안 물어봤잖아."
"그렇다고 말을 안 하냐!!! 보통 말해주잖아?!"
혼자 목소리 올리는 쵸로마츠는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려니 차츰 열기가 수그러든다. 분노, 어이없음, 포기, 체념.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이 재미있다. 언젠가 쵸로마츠는 내게 표정이 정말 안 바뀐다고 핀잔 아닌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그게 네 표정이 바뀌는 걸 보고 싶어서라고 하면 넌 또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상상해보고 옅게 웃으니 쵸로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바보같이 눈만 깜박거린다. 이것 봐.
"학급위원이 되서 방과후에 안 남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네가 그때 자지만 않았으면 부반장 될 일도 없었잖아."
"쵸로마츠형이 멋대로 반장이 되지만 않았으면 내가 덤으로 부반장이 되지도 않았어."
"그건 아무도 반장 선거에 출마를 안 하니까..."
"이런 귀찮은 일 다들 사양이라는 거지."
"그래도 학급위원이 되면 대학 입시할 때 유리하잖아."
"난 대학 갈 맘 없어."
"아, 그래."
나에게 날아드는 날카로운 시선을 만끽하며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걸 계기로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 그럼에도 어색하거나 하진 않았다. 육둥이 중 츳코미 담당이라 말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쵸로마츠이라도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말없이 편안하게 있으니까. 그게 내 작은 자랑이라는 걸 너는 알까. 말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다른 소리들이 모두 사라져서 일까, 빗방울들이 몸을 던지는 창문에 가까워서 일까 빗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할 일없이 운동장에 생긴 크레이터같은 물 웅덩이의 갯수를 헤아려 보았다. 스무개쯤 세었을 때 물 웅덩이가 자꾸 생겼다가 합쳐지는 바람에 관두었지만.
"비, 쉽게 안 그칠 것 같네."
무심히 던지는 저 말이 혼자 중얼거리는 건지, 내게 말을 거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쵸로마츠의 얼굴을 뜯어 살펴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치마츠, 혹시 예비 우산─"
"─없어."
"집에 전화─"
"─받아도 올 것 같아?"
"...아니."
"그렇지?"
"단칼이네."
"사실이니까."
"그럼 우린 어떻게 해?"
"글쎄."
글쎄라니. 너 말이야. 또 한 마디 하려는 쵸로마츠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제야 내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는지 작은 눈동자가 데굴데굴 돌아다닌다. 간간히 내려오는 번개빛이 그의 말간 얼굴을 더욱 환하게 밝히었다.
"어쩌면 여기서 하룻밤 지내야할 지도."
반 농담으로 한 말에 쵸로마츠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의사를 내보이며 얼굴을 와작 구겼다. 그에 나는 일부러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뉴스에 나올 지도 모르겠네. 지난 밤, ○○ 고등학교에서 학생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긴 누가 죽어! 하룻밤 사이에 뭐가 일어난 거야!"
"학교 지하 과학실에서 좀비가 나타나..."
"뜬금없이 좀비 아포칼립스냐고!"
때마침 번개가 내려쳐 쵸로마츠의 어깨가 튀었다. 참치 못하고 잘게 웃음을 터트리자 쵸로마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봤다. 아, 그 시선도 참을 수 없네. 그래도 포커 페이스, 포커 페이스. 아니, 그냥 매도 당하는 것도 나름대로... 아, 이런. 고민하는 사이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버렸다. 귀찮으니 그냥 넘길까.
"그정도 아니면 우리 같은 쓰레기의 죽음이 뉴스에 실릴 리가 없잖아."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우울해지니까 그런 말은 좀 하지마."
"이 상황 쵸로마츠형이 얼마 전 보여준 만화랑 비슷하지 않아?"
"응?"
"세계가 멸망한 듯한 이 분위기... 그리고 학교 안에 고립된 학생들..."
"그거 굳이 꼭 목소리 깔고 말해야해?"
목소리는 쓸데없이 좋아가지곤. 고개를 설설 젓고선 돌아서려는 쵸로마츠가 멈췄다. 빗소리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아까 번개의 영향인지 전등 두어개가 점멸한다. 곧이어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우리 자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수명이 다 했네. 마음 속으로 짧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넌 이제 쓰레기지만 나랑 달리 쓸모있는 녀석이었어.
"응,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눈을 뜨고 고개를 든다. 전등이 나간 탓에 얼굴 윤곽만 보이고 표정은 알 수 없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저리 말한 걸까. 나는 굽었던 허리를 조금 폈다.
"있지, 만약에 지금이 진짜 그런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아?"
"응?"
남몰래 마른 침을 삼킨다. 얼굴을 살필 수 없으니 호기심이 얼굴을 든다. 네 목소리로 네 생각을 알고 싶어.
"굳이 아포칼립스까지 안 가더라도 나랑 이렇게 학교에서 지내야 한다면."
쵸로마츠가 나를 본다. 어두워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 지 대강 그려졌다. 아마 또 눈을 깜박거리고 있겠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걸 보니 이 자칭 모범생은 이 쓰레기가 한 질문의 답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냥 한 번 던져본 낚시줄에 다가오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잠시 후 쵸로마츠는 고개가 떨구고는 끄응 앓았다.
"잠이야 양호실 침대에서 자도 되지만 먹을 것도 여의치 않고 뭣보다 제대로 제대로 씻을 수 없잖아. 아무리 상상이래도 난 싫어."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 젓는 쵸로마츠를 보며 먹을 것보다 씻는 게 더 중요하냐는 말은 밀어넣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다. 나는 떡밥을 던졌다.
"나는 좋을 것 같은데."
"좋긴 뭐가 좋아?"
"쵸로마츠형이랑 있으니까."
당연하다는듯이 너에게 달라붙는 오소마츠형도, 네 상냥함을 가져가는 쿠소마츠도, 자연스럽게 네게 어리광부리는 쥬시마츠도, 막내란 점으로 너를 이용하는 토도마츠도 없이 내가, 나만이 너를 독점할 수 있으니까. 추잡스러운 독점욕이다. 나도 안다. 알지만 이 마음이 들끓는 것을 멈출 수도 없고, 멈출 생각도 없다. 나는 쓰레기니까. 쵸로마츠가 나를 본다. 무슨 눈빛을 하고 있을까. 보이지 않아서 안심되면서도 불안해진다.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놓칠까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냐."
짧게 말을 뱉곤 쵸로마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결국 이런 반응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책상 위에 널부러졌다. 뭐, 그렇게 썩 나쁘진 않다다. 그렇다고 좋은 건 절대로 아니지만. 빗소리가 시끄러워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가 그치지 않네요."
갑작스런 경어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까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내게 한 말이란 걸. 오소마츠형도, 쿠소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 그 녀석이라면 알 수도 있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전등 불이 나가 참으로 유감이다. 너의 붉은 얼굴을 봐야하는데. 그림자 위에 너의 표정을 덧그리며 나는 너와 똑같이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응, 그치질 않네."
공백 미포함 3,294자
『비가 그치지 않네요. = 좀 더 곁에 있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개강한 라나애입니다.(쥬금)
글 진짜 오랜만에 써서 올리네요! 사실 오소마츠리 갔다 왔거든요ㅠㅠㅠ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좀 있지만(사고 싶은 걸 몇 개 못 삼...) 오소마츠리 너무 좋았어요 엉엉ㅠㅠㅠ 스탭분들 모두 수고 많았고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ㅠ(뜬금)
아무튼 그 덕에 오소마츠상 뽕이 차가지고 좀 빼려고(사실 이때 아니면 글 안 쓸 것 같아서) 그동안 푼 썰 중에 가장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걸로 급하게 써왔어요. 이치쵸로 제가 진짜 좋아하는데 이렇게 쓰게 되네요, 홀홀.... 저는 이치마츠가 쓰기 좀 힘들더라고요...(변명)
한창 비 올 때 떠올린 글입니다. 이제 좀 날씨 괜찮아졌는데 또 비 온다면서요? 아니겠죠? 좀 그만 와, 제발...
쓰다보니 12시가 넘고 월요일이 되었네요. 그리고 저는 월공강이 아니죠. 학교에 가야하죠. 가기 싫다.... 아, 젠장ㅋㅋㅋ 이제 보니 졸려섴ㅋㅋㅋ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버렸엌ㅋㅋㅋㅋ 죄송해요 무시하세요.
그럼 비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2차 창작 > 오소마츠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소쵸로]올해도 잘 부탁해 (0) | 2018.01.01 |
---|---|
[오소쵸로]너만의 이야기 上 (2) | 2017.12.28 |
[오소쵸로]너와 나는 그렇고 그런 사이 (1) | 2017.08.08 |
[오소쵸로]Stir 6 (5) | 2017.06.12 |
[오소쵸로]Stir 5 (2) | 2017.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