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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왕자 오소마츠 X 세헤라자데 쵸로마츠






사막에서는 모든 것이 귀하다. 물도, 식량도, 그리고 왕가의 자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태양의 저주를 받은 땅에 힘겹게 나라를 세웠건만 왕가는 자신들의 대가 끊길까 늘 전전긍긍했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통치자가 없어지면 질서를 잃고 내란이 일어날까 늘 불안해했다. 모든 왕족과 백성이 바라고 바란 결과일까, 드디어 왕자가 태어났다. 사막에 단비가 내린 것과 같은 소식에 온 나라가 왕자의 탄생을 축복했다. 모든 이가 왕자를 떠받들고, 칭찬하며, 아꼈다. 그 엄청난 사랑 속에서 왕자는 하루하루 자라났다. 터무니 없는 망나니로.


"심~심~하~다~"


대낮부터 플로트 위에 누워 덜렁덜렁 다리만 흔들고 있는 오소마츠를 보며 가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에 있는 이 백수같은 사람이 유일무이한 왕위계승권 1위인 왕자라는 것을 누가 믿을까. 공부나 일은 허구한 날 내팽겨치고 왕궁 밖으로 놀러나가기 일쑤다. 그냥 밖에 나갔다 오기만 하면 다행이다. 툭하면 사고를 치고 돌아오니 가신들은 그 일을 덮는 데에 전문가가 되버렸다. 어찌저찌 왕궁에 데려다놓으면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하거나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장난을 치곤 했다. 가신들이 백방으로 그런 오소마츠를 고치려 노력했으나 사막에 나라를 세운 왕가의 DNA때문인지 도리어 가신들이 그의 손에 놀아나버린다.


그러다보니 오소마츠를 옥이야 금이야 떠받든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이제 왕실쪽 사람들은 쉬쉬거리며 오소마츠를 욕하기 바빴다. 아직은 왕이 건재한 터라 소소한 정도지만 그의 측근들은 그것이 혹 반란의 불씨로 변할까봐 노심초사했다.


"있지, 뭐 재미있는 거 없어?"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이러고 있으니. 가신은 또다시 한숨을 삼키고 공손히 말을 꺼냈다.


"재미있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꾼은 어떠신지요. 요즘 향간에서 소문이 자자한 모양입니다."


"아, 그래?"


"예. '세헤라자데'라고 불리는 미인이 있는데 그녀가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미인?!"


관심없다는듯 코를 파던 오소마츠가 벌떡 일어났다. 미인이라고? 얼마나 예쁜데? 욕망에 철저한 질문에 가신은 쓰게 웃었다.


"좋아! 당장 그 미인을 데려와!"


"네, 그 이야기꾼을 데려오겠습니다."


본심은 꾹꾹 억누른채 가신은 유유히 방 밖으로 나갔다.


"헤에~ 네가 세헤라자데?"


오소마츠의 질문에도 세헤라자데는 말없이 그저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예의를 지키고 있으나 그렇다고 기품있고 당찬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소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헤라자데에게 다가갔다. 단아하게 묶은 길고 긴 검은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려와 있었고, 가는 몸선은 그림마냥 아름다웠다. 오소마츠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세헤라자데를 일으켰다. 시선을 맞추고 그녀가 쓴 베일을 살짝 들어올린 순간 오소마츠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뭐야, 생각보다 안 예쁘잖아. 마을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외모~"


오소마츠는 베일을 도로 씌우며 실망한 티를 팍팍 냈다. 본인 눈 앞에 사람을 두고 대놓고 외모 평가를 하는 오소마츠를 보며 가신들은 질린다는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례하시군요."


미성의 목소리와 달리 실랄한 말에 오소마츠가 두 눈을 껌벅이고, 가신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세헤라자데만이 혼자 아무런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오소마츠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하지만 왕자는 왕자이기에 오소마츠 앞에서 솔직히 일침을 날리는 이는 아무도 없엇다. 오소마츠는 세헤라자데의 말을 이해 못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 너 뭐라고?"


"상대방 앞에서 함부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왕자님."


"하아?"


"그럼 인사를 드렸으니 이만 물러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이따 밤에 하도록 하죠."


모름지기 자기 전 듣는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세헤라자데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도도히 돌아갔다. 잠시 찾아온 정적의 시간 속에서 오소마츠는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잠시 후 노발대발하는 오소마츠를 가신들은 식은 땀을 흘리며 말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서~와~."


오소마츠는 기분 나쁘다는 걸 숨기지도 않고 세헤라자데를 맞았다. 세헤라자데는 그걸 모르는지 신경을 안 쓰는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허리를 숙이고선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탁자에 올려놓은 촛불이 일렁거렸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재밌는 거! 무조건 재미있는 거! 재미없기만 해봐. 그땐 널─"


"그렇담 알리바바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너 내 말 듣고 있지?"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자님도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오소마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서 세헤라자데는 갖고 온 책을 펼쳤다. 양피지에 빼곡히 수려한 글자가 가득차 있었다. 세헤라자데는 시선을 약간 내리깔고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한 문장, 한 문장씩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마다 구겨져 있던 오소마츠의 표정이 펴졌다. 무척 고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펼쳐나가자 오소마츠는 그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속 장면이 눈 앞에 그려졌다. 세헤라자데는 연기도 곁들이고, 노련하게 강약을 조절하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오소마츠는 이야기가 끊길까 말 한 마디 안 하고 얌전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길었던 이야기가 단숨에 끝이 나고 세헤라자데는 두꺼운 책을 일부러 소리나게 덮었다. 턱하는 소리와 함께 오소마츠는 긴 숨을 토해냈다. 이야기의 여운이 그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 다른 이야기도 해주면 안 돼?"


옷자락을 붙잡고 떼를 쓰는 오소마츠에 세헤라자데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책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오소마츠를 도로 침대에 눕힌 후 이불을 꼭꼭 덮어주었다. 아이를 잠재우듯 친절한 손길에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내쉬었다. 세헤라자데는 허리를 숙여 오소마츠와 눈을 맞추고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제 이야기는 하루에 하나씩만 들을 수 있습니다, 왕자님."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할 말만 하고 쏙 사라지는 세헤라자데의 뒷모습에 오소마츠는 멍청하게 바라만 보기만 했다.


"잠깐만! 나 왕자인데요? 카리스마 레전드 왕자 명령을 지금 거부한 거야?"


잠도 다 깨서 오소마츠는 일어나 침대 위에서 마구 날뛰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냉정히 자신의 말이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다. 그냥 확 내쫓아버려? 그치만 이야기는 더 듣고 싶고! 씩씩거리던 오소마츠는 결국 제풀에 지쳐 침대 위에 엎어졌다. 점점 감기는 눈꺼풀에 아까 들었던 알리바바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우햐~ 잘 풀려서 다행이다~"


세헤라자데가 책을 덮음과 동시에 오소마츠가 축 몸을 늘여뜨렸다.


"배드엔딩 될까봐 조마조마했네. 역시 해피엔딩이 좋단 말이지~ 배드엔딩은 뒷맛이 나빠."


"그렇습니까. 그럼 앞으로는 해피엔딩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네가 하는 이야기는 뭐든 다 재미있으니까."


세헤라자데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오소마츠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책을 탁자에 올려두고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갔을 세헤라자데가 남아있는 것이 신기해 오소마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촛불 빛에 그녀의 얼굴 반만 보이고, 나머지 반은 어두웠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허구입니다만, 모두 현실을 기반으로 합니다."


"엉? 그럼 램프의 요정도 진짜 있어?"


"아니요."


"에이, 뭐야."


"그렇지만 오늘 이야기에서 나온 도적단이나 전염병, 자연재해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사실 이야기보다 현실이 더하죠."


갑자스런 이야기에 오소마츠는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에 맞춰 세헤라자데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소마츠는 마른 침을 삼켰다. 평소에는 칙칙하기만 하던 눈에 감정이 섞여있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바람에서 탄생합니다. 현실은 이렇지만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걸 이야기에 담는 거죠. 이번 이야기도 그러한 것입니다."


"현실은 그러한데 이야기만 행복하면 허무하지 않아?"


"현실이 너무 힘이 들기에 허구인 이야기로나마 위안을 삼는 겁니다."


"뭐야, 그게. 잘 모르겠어."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왕자님."


세헤라자데는 거기서 한 번 말을 끊었다. 오소마츠는 참을성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헤라자데는 숨을 들이마쉬고 조용히 읊조렸다.


"이야기는 끝이 정해져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건 알아주십시오. 현실은...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세헤라자데는 답지 않게 서둘러서 방을 떠났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오소마츠는 그녀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애써 잠들려할 때마다 미약하게 흔들리던 작은 눈동자가 오소마츠를 괴롭혔다.


도장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천천히 멈추고 나자 오소마츠는 구태여 그걸 또 돌렸다. 양피지의 산 사이에서 오소마츠는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았다. 웬일로 자리에 앉아있지만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는 오소마츠를 보며 가신은 기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갈등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제야 오소마츠는 도장에서 시선을 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생활지 너머, 광할한 사막이 보였다.


"있지."


"네, 왕자님."


"이번 년도에 전염병같은 거 있어?"


"네?"


가신이 놀라 반문해버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소마츠는 그저 가만히 시선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가신은 황망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뇨. 왕자님께 올린 자료에도 나와있듯이 아직 큰 전염병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지만 식량난이 심각한 구역이 좀 있네. 왕실에 비축해둔 식량 있으니까 그걸로 여기 표시한 세 지역에 구휼 좀 해. 요즘 도적단 기승인 모양이니까 도적단이 자주 나타나는 길목 확인 후 잘 피해서 가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가신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서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에서 도망치고 놀기 바쁘던 왕자님이 바쁘게 서류를 살펴보며 명령을 내리고 있다. 지금 자신이 보고, 듣고 있는 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내 말 듣고 있어?"


"아, 네넵!"


"그럼 이거 빨리 넘겨."


"알겠습니다, 왕자님!"


건내주는 양피지를 받아들고 가신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만에 하나 꿈이 아니라면 저 변덕스러운 왕자님 기분이 바뀌기 전에 이 안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오늘은 일 좀 하신 모양이더군요."


평소 의례적으로 건내던 인사말이 아닌 말에 오소마츠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여느 때처럼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반듯이 앉은 세헤라자데는 담백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오소마츠를 대했다.


"어떻게 알았어?"


"저는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에 민감할 수 밖에 없죠. 뭐, 이번 건 다들 왕자님이 올리신 안건에 대해 얘기하기 바빴으니 이야기꾼이 아니여도 알았겠지만요."


"헤헹~ 좀 부끄럽네!"


"네, 제발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얼마나 일을 안 했으면 그 정도로 이 소란입니까."


"쳇, 쩨쩨하게 좋은 소리 한 번 안 해주네."


"...잘하셨습니다."


"어?"


오소마츠는 제 귀를 의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럼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한 번만 더 말해줘어~!"


"밤입니다. 소란 피우지 마세요, 왕자님."


냉정히 오소마츠를 밀어내는 손에 열기가 돌고 있었다. 흘낏 훔쳐보니 베일 아래에 비쳐보이는 구릿빛 피부가 평소보다 조금 더 붉은 것 같았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 그렇게 냉철한 척 다 하더니 이렇게 티가 나는 거야? 오소마츠의 입꼬리가 히죽히죽 올라간다. 오소마츠가 표정을 풀 생각을 안하자 세헤라자데는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오소마츠에겐 새로운 표정을 또 봤다는 기쁨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무마시키기 위해서인지 세헤라자데는 서둘러 두꺼운 책을 펼쳤다.


"그럼 오늘은─"


"나나! 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바보같은 소리를 덮으러 세헤라자데는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조차도 신기하다는듯 오소마츠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네 이야기가 듣고 싶어!"


"늘 제 이야기 듣고 계시잖아요."


"그런 이야기 말고 네 이야기. 너만의 이야기!"


"...제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답답하네!"


성질을 내며 제 가슴께를 치던 오소마츠가 다가가자 세헤라자데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앉아있던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소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세헤라자데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야?"


"예?"


세헤라자데는 평소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오소마츠는 천천히 쵸로마츠 뺨에 손을 갖다대었다. 움찔거리는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베일에 손가락을 걸었다. 단단히 매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베일은 의외로 간단히 벗겨졌다. 살짝 벌어진 세모입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쵸로마츠."


저도 모르게 열린 입 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뒤늦게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빠져나간 소리가 돌아올 리가 없었다. 오소마츠는 눈을 반달처럼 곱게 뜨며 그녀의 양손을 감싸잡았다.


"쵸로마츠."


단 네 글자는 세헤라자데, 즉 쵸로마츠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쵸로마츠는 베일이 벗겨진 맨 얼굴을 옷 소매로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본명으로 불린 게 대체 얼마만이지? 어쩐지 간지러운 심장쪽을 꾸욱 누르며 쵸로마츠는 날짜를 헤아렸다. 집을 떠나고 마을 곳곳마다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니 사람들은 어느새인가 자신을 '세헤라자데'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들 자신을 세헤라자데라고 불렀고, 본명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오직 쵸로마츠가 들려주는 이야기뿐. 아무도 그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쵸로마츠 본인도 묻지 않는 것을 구태여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난 고작 이야기꾼일 뿐이니까.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존재니까. 그러는 사이 감정이 점점 메말라갔다. 손에 쥐고 있어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녀의 인간관계는 일회성이고 허무하기 그지 없었다. 그랬는데... 비록 권력에 의해 억지로 이어진 인연이지만 손을 잡아주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게 낯간지러웠다.

별안간 오소마츠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은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흘낏 훔쳐보았다. 멍청히 눈만 깜박이는 오소마츠에 쵸로마츠도 따라 눈만 꿈벅였다.


"그런 표정도 짓는 구나..."


"네?"


쵸로마츠가 인상을 찌푸리자 오소마츠는 장난스레 씩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쵸로마츠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의자를 세웠다. 무릎 위에 두꺼운 책을 펼치고 나서야 이제야 겨우 평소 구도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놀랐어~ 나랑 이름이 비슷해서."


"잘 모르셨겠지만 왕자님이 태어나시고 한 동안 왕자님과 비슷한 이름 짓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엥? 그래?"


"네. '오소마츠'란 이름엔 모든 축복이 담겨있다고 해서─"


"아!!!"


"갑자기 또 뭡니까?"


"이름!"


"네?"


"이름 처음으로 불러줬어!"


쵸로마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써도 오소마츠는 눈을 반짝이며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설마 아까 설명하느라 잠깐 말한 '오소마츠'때문에 이러는 거야? 무례하게 존엄을 입에 담았다고 호통을 들을 판에 이런 반응은 영 당혹스러웠다.


"있지, 나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안돼?"


"안됩니다."


"아, 왜!"


"왕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순 없습니다."


"우리 둘뿐이잖아. 나도 쵸로마츠라고 부를게, 응?"


또다시 손을 잡아오며 매달려오는 통에 쵸로마츠는 작게 인상을 썼다. 정말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걸까, 이 왕자님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가까운 거랬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엄벌에 처해졌을 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 쵸로마츠는 냉정히 오소마츠 손을 떼어냈다.


"쵸로마츠가 차가워..."


"오늘은 아무래도 이야기가 별로 안 끌리신가 보군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아냐! 아까 이야기 계속해서 해줘!"


하아... 쵸로마츠는 길게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오늘은 책에 있는 이야기 하기엔 글렀네. 식은 눈으로 오소마츠를 바라보니 무언으로 이야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왕자님의 성함은 나라에서 손꼽히는 점쟁이를 불러 지은 이름입니다. 저도 자세한 뜻까지는 모르지만 모든 축복과 행운이 담겨있다고 하지요. 그에 백성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자신의 아이들도 그 축복과 행운이 깃드기를 바라 왕자님과 비슷한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겁니다."


"헤에, 그렇구나. 그럼 쵸로마츠 나랑 동갑이야?"


"아뇨. 왕자님보다 한 살 어립니다."


"나보다 연하라고? 그럼 오빠라고 불러─"


"안됩니다."


"쳇. 쩨쩨하긴."


진심으로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짧은 한숨 후 쵸로마츠는 이야기를 이었다.


"저희 집은 왕자님 이름에서 '마츠'를 따왔습니다. 첫째 오빠를 시작으로 저, 그리고 동생 3명까지 총 5명이 그 이름을 물려받았지요."


"5명?! 굉장하다. 사막에선 3형제 이상 보기 힘들다던데. 크으, 역시 이 카리스마 레전드 이름 덕분인가?"


"글쎄요. 적어도 제 이름엔 축복과 행운이 깃든 것 같지 않습니다만."


쵸로마츠는 쓰게 웃었다. 팔(八)자 눈썹이 더욱 처진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인데 왜 그동안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쵸로마츠를 알면 알 수록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더욱 그녀를 알고, 더욱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오소마츠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쵸로마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 너희 가족들은 어땠어?"


"잊으셨습니까, 왕자님?"


"뭘?"


"제 이야기는 하루에 하나씩이라는 것을."


쉿. 쵸로마츠는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대고 얄궂게 웃었다. 오소마츠가 잠시 멍을 때리고 있는 사이 쵸로마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소마츠가 침대 위에서 방방 뛰며 난리를 피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백 미포함 6,760자


이게 얼마만의 오소마츠상 연성이죠...? 한 달? 두 달? 아무튼 오래되었네요... 오랜만입니다, 라나애입니다. 과제에 시험에 정신없다가 종강하고서 펑펑 놀고서 돌아왔습니다...

오소마츠상 2기... 나온 건 좋은데 너무 빻았고ㅠㅠㅠㅠ 덕심 심어서 쓰다가 내버려둔 연성인데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했고, 이러다간 계속 버려두고 있을 것 같아서 현재까지 쓴 부분 올려둡니다! 다음편은... 글쎄요. 언제 나올까요... 내년?

이게 제 올해 마지막 연성이 되겠네요. 올해 비루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날 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그럼 올 한 해동안 모두 수고 많으셨고, 미리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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