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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누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나무를 한 번, 들꽃을 한 번 매만지고서 연못 주위를 멤돌았다. 자연스레 연못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났다. 넘실넘실 넘어가던 물결은 이내 연못가에 앉아있던 쵸로마츠의 다리에 부딪혀 흩어졌다. 시원한 감촉에 그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늘도 좋은 날씨네. 작은 눈을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보이며 그가 다리를 들어올렸다. 깨끗하고 순수한 물방울이 하얀 다리에 달라붙어 있다가 곡선을 타고 도로 연못으로 돌아갔다. 퐁- 작은 소리가 아무도 모르게 울렸다가 사그라들었다.
그야말로 평화 그 자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 속, 있는 것이라곤 무수한 나무들과 그곳에 터전을 만든 여러 생물들, 그리고 이 숲을 관장하는 여신 쵸로마츠뿐이였다.
"여.신.님!"
이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예의없이 갑자기 코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악마 오소마츠를 보고 쵸로마츠는 와락 표정을 구겼다. 질리지도 않고 또 왔네. 깊은 한숨을 푹 내쉬는 쵸로마츠를 보고서도 오소마츠는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꼬리가 물결마냥 살랑살랑 흔들렸다.
"밖에 나와있었네? 혹시 나 기다린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여튼... 너 정말 한가한 녀석이구나."
"너무해~ 나도 나름대로 바쁘다궁."
퍽도 그러시겠다. 쵸로마츠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오소마츠의 이마를 때렸다.
"아!!"
조용하던 숲에 오소마츠의 짧은 비명이 울려퍼졌다. 오소마츠는 맞은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입을 삐죽 내밀곤 아프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쵸로마츠가 애써 무시하며 연못 건너편으로 가버리자 오소마츠는 금새 입을 집어넣고 검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여신님, 여신님.
무시하지마. 나 상처받아.
나 여신님 보려고 열심히 날아왔는데 나 좀 봐주라.
응? 여신님?
자기가 언제 투덜거렸다는 듯이 헤실 헤실 웃으며 쫑알거리기 시작한 오소마츠의 모습에 쵸로마츠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이 녀석은 시끄럽다. 한창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가 깨져버린 이 상황이 못마땅스러웠다. 쵸로마츠는 찌푸린 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여전히 혼자 떠들고 있는 오소마츠를 흘겨보았다. 단정한 흑발에 불쑥 튀어나온 두개의 빨간 뿔, 등에는 칠흑의 박쥐날개. 쵸로마츠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는지 오소마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쵸로마츠와 시선을 맞추었다. 살짝 붉은 기가 도는 검은 눈동자 위에 당황스러워하는 쵸로마츠가 떠올랐다. 오소마츠의 눈과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여신님? 아, 혹시 나한테 반했─악!!"
"그럴 리가 있겠냐, 악마 새끼야."
"아파! 너무해! 여신 맞아?"
"여신 맞거든?!"
그러는 너야말로 악마 맞냐! 뒷말은 싹 잘라버리고 쵸로마츠가 다시 연못가에 앉았다. 흰 천이 살포시 푸른 풀을 덮었다. 오소마츠도 그를 따라 풀밭에 편히 앉았다. 바로 쵸로마츠 옆에. 쵸로마츠가 살짝 째려보자 오소마츠는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정말 악마가 맞는 걸까. 다시 시작된 오소마츠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쵸로마츠는 생각했다.
오소마츠가 이 숲을 찾아오기 시작한 지도 어언 한 달, 아니 두 달? 어쩌면 그보다 더 되었을 지도 모른다. 영겁의 세월 동안 매일 숲속에서 지내느랴 시간 감각이 둔해진 쵸로마츠로썬 오소마츠와의 만남이 얼마나 지속된 것인지 쉬이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달이든 몇 달이든 그 기간은 악마가 질려떨어지기 충분한 시간이라고.
악마란 것들은 원래부터 욕망에 충실한 족속이다. 모든 행동이 다 흥미 위주, 재미 위주. 아주 제 마음대로 휘잡고 다니는 녀석들이 바로 악마들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재미가 없거나 흥미가 식은 것은 바로 버려버리는 녀석들이라는 거다. 그렇게 금방 타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악마들에게는 한달은 고사하고 일주일이란 시간도 길고 지루할 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뭐지.
"오늘 아침에 그 성당에 또 놀러갔는데 말이지. 그 신부가 또 아무도 없는 데 혼자 멋진 척 하고 있더라고. 나 웃겨서 죽을 뻔 했잖~"
쵸로마츠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폭소하는 오소마츠를 보았다. 시간개념이 없는 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소마츠가 이 곳을 찾아온지 기본 한 달은 넘겼다. 앞서 말했듯이 악마에게 있어 한 달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여기에 악마가 흥미나 재미를 느낄 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 다면 그것도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에게 잊혀서 버린 숲속이라 악마들이 질색할 만한 평화와 생명들의 조화만이 고요히 내려앉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오소마츠가 와서 하는 것은 그저 쵸로마츠의 옆에 앉아 혼자 신나게 떠들고 가는 것뿐. 악마의 행동을 여신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이건 같은 악마끼리도 이해못할 행동임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쵸로마츠는 턱을 괴고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한 인간같아보였다. 오래 전에 자신에게 찾아왔었던 그 인간들말이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오소마츠는 씨익 웃으며 버릇대로 코 밑을 문질렀다. 순수한 그 모습에 쵸로마츠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있지, 여긴 대체 왜 오는 거야?"
갑작스레 툭 던져진 질문에 당황했는지 오소마츠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보는 표정에 쵸로마츠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음... 그러니까- 오소마츠는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볼을 긁적거리며 한참을 뜸들였다. 평소 나불나불 잘만 말하던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쵸로마츠는 그의 희귀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내가 뭐 이상한 거 물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런 거 물어보면 나라도 당황스럽달까. 여신님 이런 거 여태까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잖아."
"금방 질려서 안 올 줄 알고 묻지 않았던 거지."
"이야, 우리 여신님 가만 보면 참 매정하단 말이야?"
"악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쵸로마츠는 손에서 턱을 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손에 닿는 풀의 감촉이 꽤 좋았다. 오소마츠가 조용해지니 다시금 자연의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바람이 부는 소리, 나뭇잎끼리 맞부딪히는 소리, 새의 조그마한 지저귐. 쵸로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 품에서 태양빛이 은은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쵸로마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정말 여긴 왜 오는 거야?"
"그게 그렇게 궁금해?"
"응. 그야 여긴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인걸. 그 흔한 인간도 전혀 찾아오지않으니 악마인 네가 재미있어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을 텐데 이상하잖아. 와서 하는 것도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고."
"...정말 모르는 거야?"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악마인 네 생각따위."
"역시 동정 여신님이네~"
"누가 동정이라는 거냐, 이 악마 새...!"
발끈해서 한 마디 내뱉으려던 쵸로마츠의 뺨에 온기가 닿았다. 이건 손? 팔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오소마츠의 눈에 닿았다. 깊고 살짝 열기를 띤 검은 눈동자를 보자 쵸로마츠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아. 손, 떼어내야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쵸로마츠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은 물론 눈동자도.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작은 눈동자에 오소마츠가 미소지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미소를. 오소마츠는 엄지손가락으로 쵸로마츠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여신님 보러 오는 게 당연하잖아."
"...하?"
"푸핫! 여신님 표정 이상해!"
언제 진지했다는 듯이 금방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볼을 잡아당겼다. 퍼뜩 정신을 차린 쵸로마츠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냈다.
"이 악마자식이!"
"우왓, 여신님 화났어? 무서워라~"
"장난이나 치는 녀석이 무섭기는 개뿔!"
"에에~? 장난 아닌데?"
진짜인데?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 오소마츠의 태도에 쵸로마츠는 그만 벙찌고 말았다. 진짜라니. 뭐가? 아까 그 말? 잠깐만, 근데 왜 날 보러 온다는 거야?! 대체 무슨 의미?! 쵸로마츠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오소마츠가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 동정 여신님에겐 어려운 말이었나 보네용! 오소마츠는 마치 동생에게 하듯이 쵸로마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나 이제 가볼게, 여신님~ 내일 또 올테니까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울긴 누가 운다는 거야! 썩 꺼져버려어어!!!"
홧김에 집어던진 젤리 아수라상은 오소마츠에게 닿지도 못한 채 포물선을 그리며 연못에 빠졌다. 검은 날개는 그 사이 검은 점이 되어있었다. 이제야 겨우 숲 속에 평화가 돌아왔지만 쵸로마츠의 평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채 씩씩 숨만 몰아쉬었다.
여신님 보러 오는 게 당연하잖아.
장난 아닌데? 진짜인데?
내일 또 올테니까 나없다고 울지 말고!
"아아! 시끄러!!"
조용한 숲 속에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 * *
"대체 뭐냐고 그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쵸로마츠가 중얼거렸다. 꼬박 하루를 생각해봤지만 나오는 답따윈 없었다.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 마치 물처럼. 쵸로마츠는 손을 휘적거렸다. 주변에 있던 물고기가 놀라 달아나버렸다. 아, 미안해. 그러려던 건 아니였는데. 쵸로마츠 입에서 나온 공기방울이 두둥실 올라가 수면에서 터졌다. 연못 위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이 고스란히 햇살에 비춰져 은빛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그걸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미뤄두었던 생각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실 악마가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찾아온다고 하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타락시키기 위해."
악마는 악을 퍼트리며 세상의 섭리를 거스리는 자. 악마의 유일한 일은 바로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매우 당연하고 뻔한 대답을 쵸로마츠는 애써 무시해왔었다.
"그야..."
쵸로마츠가 다시 느리게 눈을 떴다. 여전히 수면은 눈부시게 빛나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눈빛을 보았다. 반짝이는 그 검은 눈동자를.
"그런 걸으로는 전혀 안보이는 걸."
이야기하는 오소마츠는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쵸로마츠는 아무 반응없이 그저 듣고 있기만 하는데도 눈동자 가득 빛을 담으며 그 목소리를 계속 쏟아냈다. 무시하면 졸졸 따라오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게 타락시키려는 행동인가? 여신인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연기인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어김없이 어제 오소마츠의 표정이 떠오른다.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기도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악마들은 속이는 걸 잘한다고 하니까. 그런데 고작 이런 숲이나 지키는 나를 타락시키는 데에 그렇게까지 하나? 일단은 여신이라고 신중을 가하는 건가? 그녀석 성격 생각해보면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무엇보다도 일,이주일도 아니고 무려 한달을 넘었다고? 애초에 이런 외딴 곳까지 어떻게 오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아아!! 짜증나!! 모르겠어!!!"
쵸로마츠가 양 팔과 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물고기들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쵸로마츠의 주위를 어지러이 멤돌았다. 그럼에도 계속 버둥거리던 쵸로마츠는 결국 제풀에 지쳐 늘어지고 말았다.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오소마츠는 어딘가에서 태평하게 있을 터였다. 어쩌면 진짜로 별 생각없는 걸지도 모르지. 포기에 가까운 결론에 이르게 되자 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지금 뭐하는 건지, 참... 쵸로마츠는 몇번 미간을 누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오소마츠가 올 시간이었다.
물을 헤치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찰박하는 소리와 함께 화관이 올려진 검은 머리가 연못 위로 쏙 올라왔다. 쵸로마츠를 반기듯이 햇살이 따스히 내려왔다. 숲 속 곳곳에서 들려오는 작고 다양한 소리들은 오늘도 평화롭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쵸로마츠는 살짝 웃으며 연못가에 걸터앉았다. 오소마츠가 올 방향으로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늦어!"
쵸로마츠가 신경질을 냈다. 머리 위에 있던 해는 어느 덧 산 정상에 걸려 푸르렀던 하늘을 제 색깔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이미 오고도 충분히 남다 못해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지 말라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오던 녀석이 왜 이렇게 안 와? 땅바닥을 두드리던 쵸로마츠의 손가락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탁탁탁. 이 소리에 맞춰 새 한 마리가 그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쵸로마츠가 땅에 대고 있던 손을 내밀자 그 자그마한 발이 가늘고 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여신님, 무슨 일 있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어서 둥지로 돌아가렴. 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 말에 새는 미련없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버렸다. 전혀 다른 모습인데 오소마츠가 겹쳐보이는 것은 왜일까. 어느 새 짜증은 우울함으로 바뀌어있었다. 쵸로마츠는 괜시리 발을 휘적거렸다. 찰방거리는 소리와 함게 물결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연못 끝에 부딪혀 사라졌다. 이제 나도 그만 연못 속으로 들어갈까. 그래도 아직 저녁이고...
"...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쵸로마츠는 꿋꿋이 오소마츠가 올 방향을 바라보았다. 푸르렀던 하늘도, 새하얗던 뭉게구름도 서서히 태양의 붉은 빛에 먹혀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렇게 늦었던 적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쵸로마츠는 제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여신이 악마를 걱정하다니 이 무슨.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보이진 않지만 꽤나 안좋은 표정임이 틀림없었다. 왜인지 초조하고 불안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질문의 대상이 바뀌었지만 쵸로마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기자신이 왜 이러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악마 한명이 안 오는 것뿐인데.
「여신님」
제 곁에 목소리 하나가 없어진 것 뿐인데.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과 쵸로마츠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쵸로마츠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 지,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이미 한번 겪어본 일이었다. 허나 쵸로마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느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진득하게 들러붙은 기분은 끈질기게 쵸로마츠를 괴롭혔다. 그러지마. 그러지마. 애써 이겨냈는데. 이제야 괜찮아졌는데.
「여신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소리가 들리니 아예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여신이라 칭하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 오래 전의 이야기다. 이 숲에서 혼자 지낸 지도 어언 백년이 훌쩍 넘어가지만 인간들이 쵸로마츠를 찾아오던 시절도 있었다. 단순히 여신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고, 고민을 털어놓는 이도 있었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도 있었고, 감사를 표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의 생존이 급선무인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은 여러가지에 신경을 쏟았다. 그 각각의 이야기를, 다양한 목소리들을 쵸로마츠는 들었었다. 그런 때도 있었다.
인간들이 떠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 찾아오는 인간의 수가 적어졌다. 이야기도, 목소리도 같이 적어졌다. 그나마 들리는 것들도 자신에게 감사와 작별인사를 남기는 것이었다.
여신님, 새로 살 곳을 찾았어요. 이제 이 곳과도 이별이네요. 부디 새로운 곳에서도 잘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가는 거니? 그 곳에서도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랄게.
인간의 목소리는 쵸로마츠에게 닿아도, 쵸로마츠의 목소리는 인간들에게 닿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인간들을 볼 수 있어도, 인간들은 쵸로마츠를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멀어지는 발걸음을 쵸로마츠는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신답게 웃으며 축복을 내려줄 뿐. 그 결과 남은 것은 평화라는 이름의 적막이었다.
"외로워..!"
기어코 억눌렀던 쵸로마츠의 감정이 터져나왔다. 함께 눈물이 흘렀다. 이겨냈다, 괜찮아졌다 생각했건만 실상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여신이면서 악마가 오는 것을 계속 냅두었던 것을 보면. 오소마츠가 오는 이유는 궁금해하면서 정작 쵸로마츠는 자신이 왜 그대로 방관하는 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야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고독은 독이다. 주위가 아무리 평화로워도 혼자는 외롭다. 괴롭고 아프다. 그래서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 쓸쓸함을. 쵸로마츠는 가슴을 움켜쥐고 끅끅 울음을 삼켰다. 고요한 숲 속에선 그 소리조차도 소음이었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여신님!!!"
큰 목소리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쵸로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젠 완전히 붉어진, 황혼의 하늘 속에 그 녀석이 있었다.
"오소마츠...?"
"늦어서 미안──에, 여신님 우는 거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말해봐. 쵸로마츠의 눈 앞에서 오소마츠는 부산을 떨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정신 사납다고 한 마디 해야하는데 쵸로마츠는 그저 눈물 어린 눈으로 오소마츠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는지 오소마츠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진 데다가 얼굴이나 손에도 상처가 있었다. 이런 몸상태로 저를 보자고 급하게 날아온 모양인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지금 더 큰일난 것은 자신이면서 오소마츠는 쵸로마츠를 더 걱정스럽게 보았다. 곧이어 큰 손이 쵸로마츠의 뺨에 닿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쵸로마츠의 눈매를 살살 문질렀다. 눈물이 오소마츠의 손을 타고 내려갔다.
"울지마, 여신님."
울컥. 눈물과 함께 무언가가 치솟았다. 속에서 그 무언가가 뜨겁고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쵸로마츠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또 뭐지.
"아..."
불현듯 옛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자꾸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신경쓰이고, 늘 그 사람 생각이 나고, 있던 곳에 없으면 무슨 일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눈과 마주치면 심장이 빨리 뛰고 뜨거워진다고.
「여신님, 혹시 이게 바로─」
안돼. 안돼. 말하지 말아줘.
"여신님...?"
쵸로마츠가 말없이 눈물만 흘리자 오소마츠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쵸로마츠의 작은 눈에 오소마츠가 한가득 들어찼다. 심장고동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오소마츠를 보는 눈도, 손이 닿고 있는 뺨도, 온 몸이 다 뜨겁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설마, 설마─
「─사랑인 걸까요?」
쵸로마츠 안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 * *
오소마츠는 성당의 신부와 어쩌다보니 싸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쵸로마츠는 자신의 힘으로 오소마츠를 치유해준 후에 돌아가라고 했다. 순순히 돌아가줄 오소마츠가 아니기에 끈질기게 왜 울었는지를 캐물었지만 쵸로마츠는 시선을 피하며 그저 돌아가라며 단호한 태도를 일관했다. 결국 한 발 물러선 오소마츠가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그가 떠난 후에야 쵸로마츠는 오소마츠를 볼 수 있었다. 붉어진 하늘 속으로 그가 멀어져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쵸로마츠는 태양이 붉게 물들인 것은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연못도, 쵸로마츠 자신도 황혼에 물들어있었다.
붉게.
* * *
해는 다시 떠올랐다. 태양은 오늘도 따스하게 온 숲을 비추었고 여러 동물들이 나무들 사이를 바삐 오가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생기넘치는 일상에 단 하나, 쵸로마츠만이 제자리에 멈추어있었다. 연못의 제일 깊은 곳에 틀여박혀 물고기들조차도 다가가지 못하게 한 채 혼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심장이 옥죄어오고, 몸 속에 불구덩이가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파. 괴로워. 이런 거 난 몰라. 모른다고. 고개를 저어봐도 여지껏 눈치 못챈 것에 대한 복수를 하듯이 감정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쵸로마츠를 괴롭혔다.
이게 사랑이란 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것을 쵸로마츠는 여지껏 느껴본 적이 없었지만 보고 들은 것은 많았다. 짝사랑이든 쌍방이든 사랑과 관련된 고민을 털어놓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다 귀엽고 어여뻤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 거라고 쵸로마츠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것은 내가 이 생명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비슷한 것이라고 여겨왔었다. 그랬는데─
"─사랑이란 게 이런 거였단 말이야..?"
아니야. 사랑이란 것은 원래 이런 것이 아닐 거야. 그도 그럴게 그 인간들과 쵸로마츠의 경우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쵸로마츠는 가슴을 부여잡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연못 속이라 눈물은 나옴과 동시에 물에 섞이어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 눈물처럼 이 마음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 쵸로마츠 본인조차도 몰랐어야했다. 신이 악마에게 사랑을 품다니! 금기도 이런 금기도 없다. 신과 악마, 선과 악. 서로 대립되어야만 하는 존재일진데 함께 어울리는 것도 모자라 사랑이라니? 신에게도 악마에게도 세상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죄악감이 쵸로마츠의 숨통을 조였다. 감정이 쵸로마츠의 심장을 지졌다.
이 감정은 있어선 안된다.
뜨겁다면 식히면 되고, 있다면 없애면 된다. 쵸로마츠는 이것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아니, 믿어야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잊고 지냈던 외로움이 어제 갑자기 터져나왔던 것처럼 이 감정도 언젠가 다시 터져나올까 두려웠다. 악을 사랑한 대가는 타락이다. 타락하면 신성한 신의 위치에서 떨어져 온 몸이 더럽혀지고─
─너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쵸로마츠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방금 그건 위험하다. 사랑이 뭐길래 이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것인지! 소름이 돋은 팔을 힘껏 껴안고 이를 악물었다. 이러면 안된다. 이러면 안돼. 나는 신이야. 이 숲을 수호하는 여신! 당연한 사실들을 몇번이고 곱씹으며 쵸로마츠는 생각을 떼어내려 애썼다.
"여신님~!"
왜 하필이면 이때...! 웅크렸던 몸을 펴고 고개를 들자 연못 수면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오소마츠다. 아아, 오소마츠가 보고 싶다. 그 새까만 눈동자도, 장난끼 넘치는 미소도 너무나 보고 싶어. 낭랑한 목소리로 또 이야기를 들려줘. 쵸로마츠는 저도 모르게 뻗은 팔을 붙잡았다. 안돼. 안돼. 안돼. 이 마음은 얼른 묻어버려야 한다. 벌써부터 마음이 흔들려선 안된다. 팔도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손톱이 살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여신님, 어디 있어?"
쵸로마츠를 찾으려 오소마츠는 연못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쵸로마츠는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자신을 찾는 행동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쵸로마츠를 미치게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어제가 되어서야 처음 불러봤던 그 이름. 오소마츠. 나 여기 있어, 오소마츠.
쵸로마츠는 입을 여는 것 대신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오소마츠가 갈 때까지 버티자. 쵸로마츠가 이를 악물었다. 미움받아서 이젠 안 올 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이런 금기의 사랑을 계속 할 바에야 잠깐 아픈 것이 더 나았다. 필시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이것이 옳은 선택일 것이다. 쵸로마츠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오소마츠가 끈질긴 성격임을 알지만 악마인 그는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찬 이 연못 속까지는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이걸로...
풍덩!
...풍덩?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와 물결에 쵸로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뜨고 귀에서 손을 떼었다. 어째서. 쵸로마츠는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연못 밖에 있어야할 인영이 연못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저 검은 색이기만 했던 그림자는 뿔과 옷, 신체 구석구석까지 색이 입혀져있었다. 순수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쵸로마츠에게 향했다.
"아, 역시 여기 있었구나, 여신님"
말끝이 어그러졌다. 그럴 만도 했다. 여기는 쵸로마츠의 신력이 모인 연못. 연못 그 자체가 성수였다. 그런 연못에 악마인 오소마츠가 뛰어든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그의 뿔과 날개에서부터 서서히 녹아가고 있었다. 아플 텐데도, 고통스러울 텐데도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에게 다가왔다.
"걱정했잖아."
"지금 네가 남 걱정할 때야?!!"
쵸로마츠는 한 마디 빽 내지르고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최고의 속도로 연못 위로 올라갔다. 처음 잡아보는 손은 크고 딱딱했지만 차갑게 식어있는 데다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 무서웠다. 오소마츠가 괜찮다는 듯이 쵸로마츠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동시에 두 사람이 연못 위로 솟구쳐올랐다. 그 반동으로 거대한 파도가 만들어졌고 물이 연못가로 넘쳐흘러 풀과 꽃을 적셨다.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햇빛을 일곱빛깔로 쪼갰다. 그러나 그 무엇도 쵸로마츠의 시선을 잡아내진 못했다.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두 손을 행여나 놓칠 새라 꼭 잡고 오소마츠를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어제 치유했다고는 하나 신부와의 싸움으로 생긴 피로도 남아있을 터였다. 바보녀석. 쵸로마츠는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감은 후 기도하듯 맞잡은 손을 제 이마에 가져다대었다. 이내 쵸로마츠의 화관에서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더니 영롱한 초록 빛이 오소마츠를 감싸돌았다. 포근하고 따뜻한 감각이 돌 때마다 녹고 내려앉았던 신체 하나 하나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소마츠는 쵸로마츠를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황홀한 감각에 오소마츠가 몸을 떨었다.
"아직도 아파?"
"응?"
"이상하다. 다 치유되었을텐데..."
방금 그걸 아파서 떤 거라고 생각한 걸까. 쵸로마츠는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눈망울로 꼼꼼하게 오소마츠의 몸을 살폈다. 얼른 뒤돌아봐. 보채는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몸을 움직였다.
"?!"
오소마츠는 쵸로마츠를 끌어안았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쵸로마츠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연못 아니면 숲 속에만 있으면서 어쩐지 달콤한 냄새가 났다. 부비적거리자 '힉!'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귀여워. 참지 못하고 더 세게 껴안았더니 가늘고 흰 손이 조심스레 오소마츠에게 닿았다. 그리고선 살살 등을 쓸어내렸다. 응? 뭐야, 이거? 아직도 아프다고 생각하는 거? 오소마츠의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갔다.
"아! 여신님 진짜!"
"왜? 진짜 어디 아파?"
"굳이 아프다고 한다면 심장이─꾸엑!"
"뭐래, 이 자식이!"
퍼억! 쵸로마츠의 주먹이 정확히 오소마츠의 옆구리에 꽂혔다. 오소마츠는 급히 제 옆구리를 감쌌다. 이젠 정말 아파서 떨고 있다.
"아... 아파.. 여신님 주먹 진짜 매워... 너무해~"
"너무한 게 누군데! 내 걱정 물어내, 이 악마야!!"
"나 걱정했엉?"
"당연하지!"
에.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뱉은 입이 떡 벌어졌다. 오소마츠가 굳어있자 쵸로마츠는 냅다 그의 멱살을 잡았다.
"진짜 미쳤어?! 죽을 려고 작정했냐고!! 이 악마 새끼야!!! 이 연못은 내 구역인 숲의 중심이야! 뺀질나게 왔다갔다거렸으니 잘 알텐데? 가장 내 힘이, 성력이 연못에 가장 집중되어 있다는 걸! 성수 그 자체란 말이야! 진짜 조금만 늦었어도 너 죽었어! 알아?! 그렇게까지 몸이 녹아내렸잖아!!! 그런데 뭐? 그런 상황에서 뭐? 걱정했다고?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하! 나참! 뇌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병신 새꺄!!!!"
"자, 잠깐만. 여신님 진정해, 진정. 숨 넘어가겠다..."
오소마츠의 말대로 쵸로마츠는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 따발총같이 쏘아댄 탓에 힘이 빠졌는지 잡는 힘이 약해지고 고개가 떨구어졌다. 오소마츠는 손을 떼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쵸로마츠의 안색을 살피려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때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너 진짜 뭐야..."
"여신..님..?"
"뭐냐고, 진짜..."
"에? 에?? 여신님 울어? 그렇게 놀란 거야? 아아아!! 미안해, 여신님! 그러니까─"
"─악마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쵸로마츠가 고개를 처들고 오소마츠와 눈을 마주쳤다. 작은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왜... 매일 날 찾아오는 거야... 왜 자신보다 날 생각해주는 거냐고... 악마주제에... 넌 악마인데 왜..."
나는 널 좋아하게 된 걸까. 마지막 말은 끝끝내 말하질 못했다. 입 밖으로 나와버리면 그걸로 끝일 것만 같았기에. 말한 그 순간 금기를 저지른 대가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오소마츠가 변해버릴까봐 두려웠다. 경멸의 말을 쏟아낼 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건 다 거짓말이었는데 속아넘어와줘서 고맙다고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소마츠와 떨어져있던 것도 힘든 지금, 그런 말까지 들어버린다면 쵸로마츠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금기에 대한 대가 이전에 쵸로마츠 본인 스스로 무너져내릴 것이 틀림없었다.
오소마츠는 불안하게 떨리는 쵸로마츠의 눈을 지긋이 보았다. 마치 거기에 시선이 박힌 듯이, 손만을 움직여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느릿하게 그것을 핥았다. 짜다.
"...알려줄까?"
"뭐?"
"내가 여신님에게 이렇게 대하는 이유말이야."
알고 싶지 않아? 낮고 진지한 목소리가 쵸로마츠를 옭아맸다. 쵸로마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답해선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의 입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얼른 대답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쵸로마츠는 부르르 떨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악마의 유혹은 달콤하고 치명적이었다.
"그, 이유가...뭔데...?"
결국 쵸로마츠는 넘어가고 말았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은 오소마츠는 칭찬하는 것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두어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아하니까."
짧은 말 한 마디가 쵸로마츠의 심장을 꿰뚫었다. 전율이 전신을 휘감았다. 기쁘다. 기쁜데. 기뻐할 수가 없다. 쵸로마츠는 그의 뿔과 날개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선한 존재가 악한 기운에 휩싸이면 타락하고, 악한 존재가 선한 기운에 휩싸이면 정화된다. 그런데 그게 섞인다면? 쵸로마츠는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아아. 어쩌다가 너는 날 좋아하게 된 것일까. 어쩌다 이런 깊은 숲 속까지 흘러오게 되서... 아무리 질문을 던져보아도 쵸로마츠는 제 가슴을 움켜쥐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저기, 대답은?"
"에?"
"내 고백에 대한 대답말이야."
나도 좋아해.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말해선 안된다. 서로를 위해서.
"...나는 여신이야."
"응."
"너는 악마고."
"응."
"그런 존재 둘이 사랑하는 건 금기─"
"─쵸로마츠."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불과 몇 센티에 불과한 거리에 달큰한 체향이 코를 건드리고 검은 눈동자엔 상대의 검은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가 숨을 삼켰다.
"난 당연한 사실이나 이 세상에 규칙같은 게 듣고 싶은 거 아냐."
"하, 하지만..."
"그래, 네 말대로 난 악마야. 그런데 악마라는 건 원래 규율같은 건 무시하는 존재잖아?"
"..."
"나는 네 마음을 듣고 싶어. 말해줘. 부탁이야."
말끝과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렸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 당연히 알게 된다. 무서운 건 너도 마찬가지구나. 동질감과 애정심이 퐁퐁 솟아올랐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서로를 위해 입을 다문다는 것은 허울좋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괴로웠던 만큼 너도 괴로웠을 테지.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두 볼을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에게 했던 것처럼. 동그랗게 뜨인 눈을 바라보자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기나긴 세월동안 항상 듣는 쪽이여서 말하는 것은 영 어색하지만 쵸로마츠는 용기를 내었다. 자신의 눈 앞에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랑스러운 이가 있기에.
"나도 좋아해."
"...쵸로마츠."
"좋아해, 오소마츠."
말했다. 말해버렸다. 금기를 저질렀다는 죄악감보다 드디어 전해졌다는 기쁨이 더 컸다. 오소마츠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번져나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어린 아이처럼 부비적거리기만 하다 살짝 벌어진 틈에 오소마츠가 혀를 집어넣었다. 읍. 짧은 목소리는 농탕한 소리에 묻혀버렸다. 오소마츠의 혀가 치열을 훑고 깊은 곳까지 침투해 쵸로마츠를 탐했다. 타액과 타액이 섞이고 온기와 온기가 합쳐져 뜨겁게 달아올랐다. 쵸로마츠는 뇌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진짜로 녹는 것은 따로 있었지만.
깊은 키스를 하면서 뒤섞인 것은 비단 타액뿐만이 아니다. 선과 악. 서로 반대되는 성질 또한 뒤섞였다. 선한 존재가 악한 기운에 휩싸이면 타락하고, 악한 존재가 선한 기운에 휩싸이면 정화된다. 그런데 그게 섞인다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즉, 사라지게 된다. 두 사람은 벌써 발끝에서부터 산산히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그 조각조각은 덧없이 빛났다. 오소마츠와 쵸로마츠의 사랑을 비웃는 것처럼. 그럼에도 오소마츠와 쵸로마츠는 서로를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그 무엇도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서로의 모든 것이었다.
"후앗..."
길고 긴 키스가 끝나고 쵸로마츠는 오소마츠 품 안에서 들뜬 숨을 내쉬었다. 누군 것인지 모를 타액이 열린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숨이 차고 머리가 몽롱하다. 이젠 죄악감마저도 짜릿했다. 거칠어진 숨결을 고르고 있자 오소마츠는 쵸로마츠가 자신에게 해주었듯이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두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오소마츠는 검디 검은 머리카락에 몇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어라? 손이..."
오소마츠의 말에 쵸로마츠는 정신이 번쩍 뜨였다. 역시 넌 모르고 있었구나. 내려다본 자신의 손도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행복은 어디로 가버리고 남은 것은 절망이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오소마츠와 달리 뻔히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만둘 수도 있었으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는 것은 사치다.
쵸로마츠는 부서져가는 손으로 오소마츠를 살짝 밀어내고 다시 그의 뺨을 감쌌다. 동그랗게 뜨인 두 눈을 보자 상황에 맞지 않게 그만 웃어버렸다. 항상 먼저 스킨쉽하는 것도, 눈을 맞추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네가 하던 일이었는데.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오소마츠, 고마워."
항상 외롭던 나를 찾아와줘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나를 사랑해주어서,
"그리고 미안해."
그동안 잘 대해주지 못해서,
결국은 이렇게 사라지게 해서,
이렇게 되어서야 용기를 내어서
"...사랑해."
그 검은 눈동자도,
낭랑한 목소리도,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너의 그 모든 것을 다
정말 사랑해, 오소마츠.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입을 맞추었다. 눈물에 젖은 키스는 짰다. 오소마츠는 커진 두어번 눈을 깜박이다가 키스를 받아들였다. 무언가 깨달음을 담은 두 눈은 깊게 쵸로마츠를 바라보았다. 사라지는 마지막 한 점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사라지기 직전, 애절한 말이 쵸로마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녕, 오소마츠."
2016.05.06
공백 미포함 14336자
다들 요약글 보셨으려나? 보셨겠죠? 보셨을 거야!
누오님에게 써드리기로 한 데비메가입니다! 혼잣말로 글 쓸까라고 트윗했다가 데비메가!!외치시고는 썰까지 풀으셔서ㅋㅋㅋㅋㅋ뭐, 결론적으론 그 썰과는 많이 달라졌지만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미안해 누오님!
제목 '가여운 나의 사랑에게 작별의 키스를' 중의적이죠? 가여운이 '나'를 수식할 수도, '사랑'을 수식할 수도 있으니... 일부러 중의적이게 지어봤어요ㅎㅎ 결론만 말하자면 둘다 수식합니다. 이런 제목 한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영 센스가 없어서...
쵸로마츠 입장에서 보면 악마에게 사랑에 빠진 '나'(=쵸로마츠)와 여신인 자신을 사랑하게 된 '사랑'(=오소마츠)을 가엽다고 보고, 오소마츠에게 말그대로 작별의 키스를 하는 거고요.
오소마츠 입장에서 보면 혼자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와 전생에도 현세에도 금기된 '사랑'을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가엽다고 보는 겁니다. 뭐, 오소마츠의 가엽다는 과거형이지만요. 오소마츠에게 있어 작별의 키스란 '사랑을 관두려던 것'에 대한 작별입니다. 보시다시피 금기고 뭐고 이젠 신경 안씁니다. 오소마츠는 본격적으로 쵸로를 꼬시기 시작할 거거든요. 그 부분은 안쓸 거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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